[박기태 건양대 교수] 계절의 변화를 시기라도 하듯 그렇게도 혹독하게 불어대던 늦겨울의 세찬 바람은 어디론가 사라지도 이제 산과 들에는 겨우내 부스스 해진 머리와 몸을 추스르고 제철을 만난 듯 푸르름이 수줍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푸르름이 곧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듯 이 세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꽃들은 모두 제 가꿈의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피어나기 위해 산고의 고통을 감내하려 한다. 그들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는 우리들은 봄이란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나고 신선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낀다. 봄의 자연을 곁에 두고 사는 우리네 이웃들에게서 소리 없이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푸르름과 향기를 한껏 뽐내듯 피어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람 속에서 굶주린 육체를 운무로 목욕하고 푸르름으로 너울대고 싶은 까닭에 시인 윤의섭의 「봄의 찬가」에서 그려지는 “봄을 기다리는 꽃들의 정령” 그리고 엘리어트의 「황무지」속 한 구절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를 되새겨본다. 이들이 시 속에서 읊어대는 ’정령‘과 ’욕정‘은 그저 단순한 정령과 욕정이 아니다. 성(性)의 원리를 깨달은 것으로 생의 기원과 다를 바 없는 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삶의 원리이며 인간의 욕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봄날 피어 있는 꽃들은 아름답다. 우리의 청춘인 이십 대처럼 피어 있는 꽃들, 만약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또 얼마나 추하게 망가지고 부서져서 보잘 것 없어질 것인가? 아마도 이 세상은 추한 것들의 저장소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꽃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결코 황폐해지지 않으리라. 하얀 벚꽃들이 피어 날리는 봄, 눈송이처럼 또는 반짝거리는 생선 비늘처럼 날리는 벚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좋은 계절을 놓치면 다시 우리에게 잔인한 4월의 계절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서운한 생각도 해 본다.

시간이란 놈은 참 잔인하다. 그래서 우리가 미처 철들기 전에 화살보다 빠르게 우리를 뒤로 한 채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잔인함을 이겨내기 위해 4월의 푸르른 봄날을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진부란 행태에서 벗어나 이제는 부활의 기회로 만들어 보자. 가장 절실하고도 간절한 부활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어디서든 자신을 가다듬어 새롭게 돌아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활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봄이 오면 부활을 꿈꾸듯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육체적인 죽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에서 오는 것이다. 지난날 의 쓸 데 없는 생각이나 욕망 그리고 터무니없는 것 들을 벗어나 새로운 마음이 돋도록 노력하려는 것으로써, 재해석하면 정신적 죽음을 맞이하고 재생을 하자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고로 정신적 재생을 방해하는 그런 욕망을 죽이면 우리의 정신이 생산적이 되고 진정한 부활이 온다는 것이다. 진정한 부활의 계절은 희망의 계절이다. 짧게 오는 봄은 또한 부활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현대가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에 소원해지기 쉽다. 아울러 인간성이 메말라지고 그 인간성이 상실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성의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경고라도 하듯 엘리어트는 인간성의 황폐화에 대하여 걱정을 했고 아울러 부활에 거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탄하며 잠들어 있는 우리의 정신적 뿌리를 봄비로 깨우듯 거짓스러운 그리고 가증스러운 죽음의 상태인 현대인들을 일깨우려 「황무지」란 시를 통해 4월을 빌어 인생의 부활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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