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사계절 중 나는 봄이 제일 좋다. 여름은 너무 더워서 싫고 겨울은 너무 추워서 더 싫다. 그렇다면 가을은 어떠냐?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오곡백과도 익어가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겠지만 유난히 가을을 타는 나로서는 가을 역시 그리 달가운 계절은 아니다.

 봄에는 생명이 가득하다. '봄 春' 자의 모체가 된 한자는 '艸' + '屯' + '日', 즉 따뜻한 햇빛을 받아 초목이 태동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일본어로 봄을 '하루'라고 부르는 것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줄기마다 가지마다 새싹이 올라와 껍질이 탱탱해지는(하루 '張る')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봄에는 꽃이 만발한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이름도 모르는 들꽃, 풀꽃까지 차례차례로 그 자태를 뽐낸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던가. 모양도 색깔도 제각기 다르지만 남을 시샘하는 일 없이 자신에게 꼭 맞는 때와 장소를 지킨다.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우면서도 서로 나무라지도 탓하지도 않고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울 수가 없다.

 춘곤증 때문일까, 식곤증 때문일까. 나른한 오후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약간 몽롱해지면서 가끔 야릇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꽃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펑! 펑! 펑!' 힘껏 꽃망울을 터뜨리며 저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있다!!"고 생명의 외침을 들을 수 있겠지.

 일본사람들의 벚꽃 사랑은 유별나기도 하다. "멀리 내다보니 들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네. 거기 향기롭게 만개한 벚꽃을 좀 보세." 일본 최초의 시가집 『만엽집(萬葉集 759년경)』에도 벚꽃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상에 벚꽃만 없었어도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들뜨고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을 것을."(『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905년)』) 벚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서민이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술에 취하듯이 그 향기에 젖어서 살았다.

 그들은 꽃에는 정령(精靈)이 산다고 믿었다. 이름하여 "하나사카지지이", 꽃을 피우게 하는 할아버지라는 뜻이다. 겨울에 한번 죽었던 나뭇가지에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부활의 생기를 불어넣는 신비한 자연의 힘을 정령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내가 한국에 온지가 올해로 만 30주년. 한 세대를 뜻하는 '世'자는 원래 30년('十' × 3)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니 이곳에서 한 인생을 산 셈이다. 지금까지는 나와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60 고개를 바라보고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하다 문득 하나사카지지이가 생각났다.

 내 평생 직장은 대학이었고 내 앞에는 항상 사랑하는 제자들이 있지 않은가! 힘겹게 '푸른 봄' 청춘(靑春)을 살아가는 제자들이 세상 풍파에 쓰러지지 않게 지켜주고 저마다 꽃을 마음껏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상 더 가치 있는 일은 내게 없을 것이다. 지지이..., 할아버지 소리를 듣기엔 아직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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