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선택과 최고의 선택

▲ 황혜영교수
며칠 전 아는 학생과 상담을 하던 중 최악의 선택과 최고의 선택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는 삶에서 최악의 선택은 중학교 때 2년 동안 스타크래프트 게임 중독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 매일 새벽 자명종에 맞춰 일어나서 게임을 하고 수업시간에는 잠만 잤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회의가 들어 게임을 그만 두었는데, 갑자기 한가한 시간이 많아져 소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한다. 그때 읽은 소설이 '스타크래프트'였는데, 훤히 아는 게임이라 너무나도 쉽게 읽혀,그때부터 인터넷 소설을 쓰기 시작해 지금도 소설을 꾸준히 연재하고 있다. 소설을 선택한 것, 그것이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가 만일 중독이 되도록 게임에 빠져보지 않았더라면, 그 게임 소설을 읽으며 자기도 그런 소설을 얼마든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최악의 선택이 없었다면 최고의 선택은 어쩌면 시도해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험에서도 받은 것은 있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선택이고 그렇지 않은 것인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것이 지나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마지못한 우연찮은 선택이 결과적으로 최선의 선택일 때도 있는가 하면, 하나의 선택이 그 이전의 수많은 경험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때, 마음에 안 드는 최악의 경험이라고 싹둑 잘라내는 것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비단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상황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도 최고와 최악, 좋고 나쁨을 나누기는 마찬가지로 어렵다. 영화 '데드맨 워킹'에서 헬렌 수녀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를 며칠 동안 찾아와 함께 벗이 되어 주며, 그가 분노와 불안,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을 체험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도와준다. 한번은 사형수가 수녀로 살아가는 헬렌에게 남자에 관심이 없느냐고 묻자, 그녀는 물론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자기가 결혼해서 남편과 아이가 있었더라면 아마 '지금 여기서'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녀가 가족들과 행복을 누리고 살았더라면 죽어가는 사형수가 영혼의 위로와 사랑의 마음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
지난 달 22일 '퐁피두센터 특별전'마지막 날 마감시간 조금 전에 전시를 보러 서울시립미술관에 갔다. 사실 그날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 실망스러운 발걸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시실 한 공간 전체 벽을 올리브 잎으로 가득 채워놓은 지우제페 페노네의 '그늘을 들이마시다respirare l'ombre'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뭇잎들이 뿜는 시원한 그늘이 내 안을 가득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마침 우연히 아는 후배를 만나 전시를 다 보고 저녁을 함께 하는 소소한 즐거움도 나누었다. 약속하고 만난 것보다 더 반가웠던 예기치 못한 만남이 허전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고통은 축복과 함께 주어지는데, 우리가 고통만 보기 때문에 축복을 보지 못한다."고 한 어느 신부님의 말씀처럼, 아픔과 좌절 곁에서 위로와 축복이 우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고통만을 들여다보느라 축복을 스쳐지나버리기 쉬운 것 같다.
좋은 선택과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오는 기쁨도 물론 크고 감사하다. 하지만 고통의 순간에도 늘 곁에 있는 축복으로 시선을 돌리고, 상실 앞에서도 이미 그것이 준 기쁨과 감동을 떠올려보자. 받은 복을 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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