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줄다리기, 바구니 터트리기, 손님 찾아 달리기, 청백계주, 이름하여 전통적인 봄 운동회날 아이들의 기쁜 함성이 잔디밭에 세 들어 사는 크로바를 하얀 티밥처럼 활짝 피어나게 한다. 소인수 학교라 지역특성을 살려 특별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 어린이, 부모, 조부모가 한 팀을 이루어 운동장 트랙을 뛰어보는 3대 달리기와 오후에는 가족노래자랑으로 가정의 달 문을 열었다.

 몇 년 전 교감시절 운동회 풍경이다. 그렇게 곳곳에서 사랑과 생명의 달 5월이 시작되었다. 거의 십년만이지 싶다. 가로수로 심어진 이팝나무에 꽃들이 만개하여 매일 꿈길을 걷는 느낌이다. 크게 어여쁘지도 향기도 있는지 없는지 수염처럼 아래로 늘어진 꽃잎은 벌써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님을 생각나게 한다.

 일곱 손녀 중에 조부님은 셋째인 필자를 제일 귀애하셨다. 내 나이 다섯 살 때로 기억하는데 당시 거동이 불편하셨는지 방안에서 요강에 소변을 보시는데  요강을 밖에 들고나가 쏟아내는 일과 긴 담뱃대에 말아 피신 재떨이도 비워드리는 일을 맡아서 했다. 할아버님은 불편하셨음에도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지 않으셨고 가끔씩 "종순이는 일등 사람"하시며 장단 맞춰 응원해주셨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할아버지는 돌아가시어 하얀 상여가 마을 앞 언덕을 넘어가는 장면이 지금도 그림처럼 떠오르는데 왜 그런지 슬프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서로 충분히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가끔 고향 선산에 가면 꼭 산소를 찾아 절하고 그 시절을 상기한다. 외아들인 아버지에 이어 손녀가 교장을 지냈으니 할아버지 흥얼 노래처럼 과연 일등 사람이 된 것인가?

 실은 필자가 지난 2월로 정년을 하여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온 후 가장 안타까운 게 딱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학교교문을 매일 드나드는 어린이들과 그 어린이들의 교육을 함께 한 교직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을 더 전해줄걸, 사랑한다는 말을 더 간절히 할 걸'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사랑해줄 수 있을 때, 사랑한다 말하고 싶을 때 망설임 없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와선 지극히 부족했다는 판단으로 가슴을 치게 된 것이다. 이제 나 때문에 강당에 전교생이 모일 일은 다시없을 것이며 아이들이 졸업하면 중학생이 되어 복대교정을 떠나고 교직원들 또한 각자의 더 큰 보람과 행복을 위하여  그곳을 떠나갈 것이기에...... 언제 다시 만나겠는가?

 미국 여성 중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한 여류작가 펄벅은 "가정은 나의 대지이다. 나는 거기서 나의 정신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있다"라고 가정의 소중함을 일러주고 있다. 각급 학교도 큰 가정이나 마찬가지다. 그곳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생명이 끝까지 존중되고 교직원은 제2의 부모로서 사랑을 뿌리고 가꾸는데 일관해야 한다.

 '박진주'라는 이름으로 1967년 경기도 부천에 소사희망원을 세워 다문화아동을 위한 복지활동을 폈던 펄벅 여사의 깊은 마음이 새삼 빛나는 5월이다. 사랑은 언제나 시작이다. 지금 바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5월의 당신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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