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일보 사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지난 23일 타계했다.

김 전 총리는 현대 정치사의 증인으로 그의 정치행보는 호불호가 갈린다.

하지만 '충청맹주'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많지 않을 정도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영원한 2인자'로 불리며 정치적 아쉬움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김 전 총리는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의 정치인생은 35세 때인 196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 중령으로서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며 정치 전면에 등장한 그는 거침없는 박정희 정권의 '풍운아'였다. 

같은 해 서슬 시퍼런 중앙정보부를 창설, 초대 부장을 역임했고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1971년부터 75년까지 4년6개월간 국무총리를 재임하며 '박정희 후계자'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5.16 쿠데타 세력간 권력다툼으로 1963년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을 남기고 1차 외유에 나선 데 이어 1964년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건, 1968년 3선 개헌 추진세력과의 충돌 등으로 한때 권력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끊임없이 견제 받는 2인자로서의 숙명적 삶이 되풀이 하면서 처세와 굴신, 나아가 'JP식 정치'를 몸에 익혔다 할 수 있다. 

오랜 정치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칠맛 나는 표현들을 적절히 구사하며 자연스레 능변가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1963년 일본과의 비밀협상이 국민적 반발에 직면했을 때는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고 했고, 2011년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해 회자됐다.

특히 '충청도 핫바지론'은 유명하다.

그는 3당(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의 결과물인 민주자유당에서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이 됐지만 평소 소신인 내각제 실시 등을 놓고 갈등하며 결국 1995년 탈당한 뒤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같은 해 6월13일 천안역에서 지방선거 지원유세를 하며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를 핫바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아무 말 없는 사람, 소견이나 오기조차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라고 말해 충청권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

김 전 총리는 자민련을 이끌고 이듬해 총선에서 무려 50석을 얻는 성과를 내며 새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충청인 특유의 유화적 기질로 정적도 내편으로 만드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한국정치사의 가장 다이내믹한 장면 중 하나로꼽히는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이른바 'DJP연합'을 형성한 것이다. 

DJP의 공동정부에서 두 번째 총리에 올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총리로 꼽혔던 그는 다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며 대통령과 갈등했고, 2001년 9월 김대중 정부와 결별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역정은 '부도옹(不倒翁, 오뚝이)'로 표현되기도 한다. 

김 전 총리가 별세하면서 3김 시대, 3김 정치의 주인공이었던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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