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채소전 사람들의 발걸음은 파릇하다. 조근거리는 말소리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그들의 뒤로 풍경처럼 포대가 배를 내밀고 서있다.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한 장의 비닐로 태어났다. 누군가의 억센 손에 멱살이 잡힌 채 시장 귀퉁이로 팔려 나갔다. 나이론 줄로 단단히 꿰어놓고 거칠게 뜯어 낸 흔적이 머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노파가 새벽이슬을 털며 따낸 푸성귀가 담겼던 흔적으로 온 몸이 얼룩져 있다.

 나는 아낙들의 움직이는 손길 따라 눈을 굴리며 커다란 입으로 파릇한 것들을 삼킨다. 가끔은 수박을 엉겁결에 받아먹을 때도 있고 새콤달콤한 과일을 삼키기도 하지만 워낙 드문 일이라 내 것이 맞나 싶다. 횡재도, 결코 즐거운 일도 아니다. 달큰한 속살은 간데없고 모두 껍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채소라고 그다지 맛나거나 싱싱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것들만 용케도 찾아내어 꼭 다문 입을 억지로 벌려 밀어 넣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만찬인지 모르겠다.

 배추가 겉옷을 홀라당 벗는 시간이 있다. 아낙들이 점심을 먹고 흔한 커피를 한잔씩 마시고는 부엌칼을 든다. 찢겨졌거나 누런 잎을 하고 있는 놈들만 골라 가차 없이 베어낸다. 인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그것들을 배가 터지도록 꾸역꾸역 밀어 넣어준다. 주말이라선지 자식들에게 김치를 담가주려는 노모들로 배추가 정신없이 시집간다. 덩달아 열무가 장가 갈 때마다 떨어뜨리는 잎사귀도 먹여준다. 보들 거리는 그 맛은 안 먹어 본 포대는 말을 말아야 한다.

 저녁때는 아낙들도 지쳤는지 딴 짓만 하고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저울에 채소를 올려놓고 몸무게를 단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큰소리로 몸무게를 말해주고 스티커를 한 장씩 부쳐 준다. 정말 교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는 수밖에 없다. 뽀로통해진 것을 눈치 챌세라 안면근육을 풀어주는 운동을 한다.

 어찌되었건 실컷 얻어먹어 배가 빵빵해졌다. 포만감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귀를 우악스럽게 잡는다. 반항해보지만 별 수 없이 번쩍 들려서 서울구경을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가에 있던 채소들이 쑤욱 내려갔다. 아낙이 누런 잎들을 찾아내고 있다. 그만해도 된다고 소리쳐도 들리지 않나보다. 더 이상 삼킬 수 없을 때쯤 아예 입을 묶어 버린다. 항의도 할 수 없고 그저 눈을 감아 버린다. 아낙들은 일면식도 없는 닭의 모이를 겨우 한 포대 채웠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한참을 차에 실려가 묶였던 입을 풀어 주는가 싶더니 다리를 잡고 비행기를 태운다. 채소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닭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채소를 탐닉한다. 내 몸이 똘똘 말리는가 싶더니 컴컴한 구석에 던져진다. 무리에서 밀려난 놈이 나를 쪼아 댄다. 처음부터 낭창낭창한 꽃집 아가씨를 만났더라면 내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두 눈 꼭 감고 다음 생엔 향내 나는 비닐로 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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