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비가 내린다. 단비가 내린다. 이른 새벽 오랜만에 내리는 빗소리가 참 좋다. 무심코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뜻밖에 흘러나오듯이 선물같이 반가운 빗소리다. 일찍 잠에서 깨어 창을 활짝 연다. 비에 젖은 우암산이 집안 가득 들어온다. 건조했던 피부에 촉촉하게 수분이 스며들은 우안산은 청초한 얼굴로 싱그럽게 아침 안부를 묻는다.

 푸르고 푸르다. 푸르른 향기가 집안으로 스며든다. 기다렸던 비는 시끌벅적했던 유월의 묵은 감정들을 씻어주듯이 시원하게 내린다. 베란다의 화분들도 나도 생기가 돋는다. 우리 엄마도 생기가 나겠다. 이제 조석으로 엄마의 비 타령 전화를 안 받아도 될 것 같다. 그제는 서리태콩 싹이 다 말라서 비틀어진다 하시고 어제는 옥수수 대가 비들비들 말라간다고 걱정이셨다. 날마다 식수를 퍼 나르셨다. 그렇게 목을 축여주는 일도 힘에 부쳐서 못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비가 내리니 단비이다.

 가물었던 유월에는 마음이 타들어 가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자기만 찍어 주면 하늘에서 별도 달도 따다 주고 마치 비라도 내려주게 할 것처럼 큰 소리를 쳤었다. 온 동네방네를 누비고 다니면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대던 사람들은 오히려 외면을 당했고 사람들은 냉철했다. 불쑥불쑥 악수를 청하며 표를 구걸했다.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악수했던 손들도 표심은 결국 다른 곳으로 향했다. 촛불의 바람이 태풍의 눈이 되어서 전국을 휩쓸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이 땅에 정녕 평화도 오는가하고 푸른 꿈을 꾸게 되었다. 너덜너덜 서로 비방하고 생채기 냈던 현수막만 바람에 펄럭인다. 제일 먼저 잽싸게 현수막을 내달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가장 오랫동안 흉물로 남아 있다. 선택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얼굴 명함이 더 많이 거리에 쓰레기가 되었다. 성원에 보답하겠다는 달콤한 말을 또 한 번 철통같이 믿어보기로 한다. 거북이 등같이 쩍쩍 갈라진 메마른 민심에 단비 같은 좋은 일을 기대해 보고 싶다. 

 우국충정의 고독한 심회가 비장하게 그려져 있는 '한산도가'로 잘 알려진 통영이다. "아들이 시장이지 내가 시장인가" 이번 시장 선거에서 통영시장으로 당선된 아들을 두고도 경비원 일을 계속하겠다는 당선자 아버지의 인터뷰를 보았다. 한산섬 충무공의 시름이 조금이나마 달래지겠구나 싶었다. 높을수록 낮아지는 이 어르신의 자제는 분명 훌륭한 위정자가 될 거라는 믿음이 갔다. 높을수록 더 높이 올라가고만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천지이다. 단비 오는 날 우리엄마가 콧노래를 부르듯이 단비 같이 좋은 소식이 가득한 세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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