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삼국시대의 서예 - 정현숙·일조각

 

금석·목간 등 대부분 자료 실어
각각의 색으로 문자문화 금자탑
백제서예가 일본에 미친 영향 등
고대 동아시아 문화전파도 살펴

[충청일보 신홍균기자] 한국목간학회·한국서예학회 부회장이며 원광대학교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인 정현숙씨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서예를 총망라해 조명한 최초의 연구서다.

현재까지 발굴된 금석과 목간 등 삼국의 문자 자료 대부분을 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삼국 서예의 특징을 각각 살피고 삼국 글씨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비교, 분석했다.

삼국의 중국 서예 수용과 변용, 고구려 서예와 신라 서예의 연관성, 백제 서예가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 신라 서예가 가야와 일본 서예에 미친 영향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의 서예문화가 전파되는 과정도 살폈다.

 

저자는 삼국 글씨의 다름에서 독창성과 정체성을 찾고자 한 동시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삼국의 서예에 공통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또 각기 다른 색을 가진 삼국의 글씨는 각기 다른 역할로 고대 동아시아 문자문화에 금자탑을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은 석비, 벽돌, 기와, 나무 등 다양한 재료에 문자를 남겼으며 그 내용은 공적인 것도 있고 사적인 것도 있다.

용도에 따라 재료의 선택이 달라지고 글씨가 달라지기도 했으며 서사 재료나 도구에 따라 서체와 서풍이 달라지기도 했다. 반면, 약 1세기 동안 같은 서풍을 유지한 나라도 있다.

 

고구려의 글씨는 용도에 따라 서풍을 달리했는데 공식 비문에서는 웅강함을, 비공식 각석에서는 자유스러움을 추구했다.

즉, 국가적 사건을 기록한 비에는 고구려의 진취적 기상을 드러내는 웅건무밀한 글씨를 썼고 개인적 용도의 금석문에는 편한 마음으로 자유로운 서체를 구사했다.

이것은 삼국 중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고구려 서예의 특징이자 정체성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 고구려 서예는 신라 서예에 영향을 줬다.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 출토된 '광개토왕호우'·'연수원년명은합'·'광개토왕비'·'집안고구려비'·'충주고구려비'·'평양성고성각석' 등 5~6세기 고구려 금석문에 보이는 예해지간의 글씨, 힘차면서 고박한 서풍, 예서와 행서의 필의가 가미된 필법 등을 통해 6세기 신라비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전아하면서 유려한 서풍을 구사했는데, 이는 중국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에 출토된 불교 관련 문자 자료들은 기존 서풍과 대비되는 질박한 분위기가 있어 백제 서예에 대한 총체적 연구가 필요해졌다. 또 고구려에는 없는 행정 문서인 목간이 다량 출토돼 백제의 서예문화를 더 깊게 살필 수 있게 됐다.

백제 서예는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중시하면서 서사 재료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의 세련미와 고박미를 동시에 보여 주는 개성적 서예를 창조했다.

한문 발달 정도도 같은 시기 고구려나 신라보다 앞섰는데, 이두(吏讀·우리말을 한자(漢字)를 빌려 표기(表記)하던 방법(方法)의 하나) 양식을 보인 고구려나 신라의 명문과는 달리 '무령왕지석'에서 보듯이 백제는 중국의 한문 양식을 따랐다.

또 백제의 글씨는 고대 일본의 목간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아스카 시대의 목간에 쓰인 '논어'·'천자문'·'관세음경'은 백제가 전한 유교경전, 불교경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목간의 문장 양식이나 글자 형태 등도 백제와 유사해 백제 도왜인(渡倭人)이 전한 글씨를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목간에서 보이는 백제 서예의 흔적은 7세기 백제의 개방성과 다양성, 국제성을 보여 주는 증거다. 백제는 자국의 서예문화를 융성시킴과 동시에 그것을 일본에 보급하는 전령사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시아 문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라는 5세기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예속됐고, 따라서 문화도 그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서예문화도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날 무렵에는 문장과 글씨에서 신라 만의 특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세기에는 목간을 통해 신라식 이두를 표현했으며 자간이 없어 두 글자가 한 글자처럼 보이는 합문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명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신라 서예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일관성과 다양성이다. 다양한 석비 형태와 그 석비 형태를 따른 서법의 다채로움은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는 신라인의 적응력과 순발력을 상징한다.

또 서체와 서풍의 일관성은 중국으로부터 먼 지리적 환경으로 선진 문물의 영향을 덜 받은 신라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성품의 표상이다. 이것이 곧 글씨를 통해 표현한 신라인의 창의성이요, 정체성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서예를 수용했지만 창신(創新)으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이후 중국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외래 서풍인 북위풍도 수용했는데 이는 신라 서예의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와 일본에 자국의 서예문화를 전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문자문화 전파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런 특성을 지닌 삼국의 서예문화는 통일신라 서예문화의 기반이 되고 그 다양성의 원천이 됐다.

저자는 서체와 판독에 이견이 있는 자료를 서예학적 관점으로 접근해 풀었다.

서체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각 글자의 운필과 필법을 기준으로 삼았고 판독에서는 내용보다 당시 서자의 관점에서 장법과 결구, 필획의 특징 등으로 글자 자체를 읽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글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근거로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합당한 의견을 제시했다. 초기의 잘못된 판독이 검증 없이 재인용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는데, 그런 명백한 오독도 수정했다. 후학들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출처도 최대한 밝혔다. 

또한 서자의 필법은 물론 각자의 각법(刻法)에도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금석문 연구에서 글씨의 미적 요소를 논하기 위해서는 입체감이 살아 있는 각(刻)을 살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실물 중심의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령왕지석', '왕궁리오층석탑금강경판', '대구무술명오작비' 등을 통해 고대에는 각공조차 서법을 터득한 후 각에 임했음을 확인했다.

저자는 경북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한 뒤 원광대학교에서 한국서예사로 미술학 석사 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학교(UPenn)에서 동양미술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KBS전국휘호대회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원광대에서 금석학, 서예사, 서예미학 등을 강의했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신라의 서예'·'한국서예사'(공저)·'영남서예의 재조명'(공저)·'월전 장우성 시서화 연구'(공저)·'한류와 한사상'(공저), 역서로 '광예주쌍집'(공역)·'미불과 중국 서예의 고전'·'서예 미학과 기법'이 있으며 서화 논문 45편이 있다.

508쪽. 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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