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예수님 당시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때 밭을 갈기 전에 먼저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씨앗을 다 뿌리고 나면 이후에 쟁기로 밭을 갈면서 뿌렸던 씨앗을 땅에 묻었다.

이때 농부는 씨를 뿌릴 때 하나하나 정성을 들여 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한 주먹 움켜지고는 그냥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흩어서 뿌렸다. 그래서 대부분의 씨앗은 밭에 심겨지게 되지만 어떤 경우는 밭이 아닌 다른 곳에 뿌려져 결실을 맺지 못하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예수가 이와 같은 당시 상황을 빗대어 말한 비유가 나온다. 그 비유에 따르면 농부가 뿌린 씨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돌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곳에 떨어진 씨앗들은 여러 문제들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은 잘 자라나서 결실할 때가 오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농부에게 안겨 준다.

이와 같은 예수의 비유의 핵심은 결과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씨 뿌리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야 길가나 돌밭에 떨어진 씨앗들로 계속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해도 언젠가 더러 좋은 땅에 심겨진 씨앗들로 인해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씨를 뿌리는 자만이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가능성’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실현 정도를 뜻한다. 가능성이 높으면 그 일은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이고 가능성이 낮으면 그 일은 일어날 확률이 낮은 것이다.

그런데 가능성이 높던지 낮던지 분명한 것은 그 일은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 결실은 여전히 가능성에 불과하다. 그 일은 시간이 지난 후 결실할 때가 되어서야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능성을 현실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가능성은 여전히 미래의 일이며 아무리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면서 자신이 결실을 얻을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가능성을 바라보며 씨를 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여름 내 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실을 위한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지 결실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우리의 삶에서 결과를 확신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많지 않다. 오히려 우리 노력의 대부분은 가능성을 높이는 것에 그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야 말로 우리가 바라보아야할 목표임을 기억해야 한다. 가능성의 핵심은 그 확률이 얼마나 높으냐가 아니다.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확률이 낮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그 일은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농부는 어떤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질 것이며 그 한 알의 씨앗이 몇 배의 결실을 줄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농부는 때가 되면 또 다시 밭에 나가 씨를 뿌려야 한다.

그리고 결실의 때가 오기까지 씨앗이 담고 있는 결실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땀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 그 후 생각지 못한 문제로 그해 아무 결실을 얻지 못했더라도 다음 해가 되면 또 다시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올해도 결실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씨뿌리기를 멈추지 않는 자만이 결국 결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높은 가능성만 타진하며 시도 자체를 망설이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결실의 확률도 줄어드는 것이다. 성공의 확률은 실패확률과 반비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공의 확률은 시도의 횟수와 관련이 있다.

성공의 확률은 ‘몇 번의 실패를 경험했는가?’ 보다는 ‘몇 번의 씨를 뿌렸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을 위한 가장 확실한 노력은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길 가나 돌밭에 떨어진 씨들로 인해 실패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오늘 또 다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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