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한옥자 수필가] 좁은 산책길로 대형 트럭이 지나갔다. 앞바퀴 두 개, 중간 바퀴 네 개, 뒷바퀴 네 개. 열 개의 바퀴에 민들레와 질경이는 무참히 밟혔고 곱게 핀 망초 꽃은 무더기로 꺾였다.

며칠 후 같은 길을 걸었다. 밟히고 꺾인 풀과 꽃은 벌떡 일어나 잘 자라고 있었다. 밟힐수록 일어서는 잡초의 근성 덕분이다.

그가 어느 날, 한방에 훅 갔다. 그만 간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고 그를 아끼던 도민, 그의 정치적 동지, 지인들, 그의 의미심장한 철학적 언어를 좋아하던 이의 마음도 훅 갔다. 필자도 그랬다.

그의 많은 아군은 즉시 적군으로 돌아섰거나 한동안 가슴을 앓았거나 지금도 앓고 있다. 사건 이후 초췌하고 여유 없던 그의 표정이 최근 약간은 여유로웠고 당당해졌다. 한 여인의 발설 여파는 트럭의 바퀴보다 더 강력해서 모든 것을 다 잃을 거라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고 추측했지만, 생의 의지는 죽지 않았다. 아내까지 증인으로 내세웠으니 말이다. 아내 된 사람들은 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지. 그럼에도 자식들의 아버지를 위해 그 자리에 섰다.

TV 화면에서 사건의 피고로 그를 만나는 일은 괴롭다. 언론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시청자를 자극하고 심지어 피해자에 대해 의심하는 여론몰이의 일등공신 노릇을 한다. 점차 사건의 본질은 희석되고 피해자는 2차 피해를, 이 나라의 여성들은 죽기를 기망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동조했다는 오명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7월 2일 시작한 첫 공판 이후로 2차, 3차 그리고 6차 공판까지 언론은 피고인 측의 주장과 증언을 여과 없이 보도하고 있다. 보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본인은 고결한 척 손가락질을 하거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까? 이 사회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뿌리박힌 남성우월주의 문화를 성토하며 피해자를 가여워 할까?

누구는 왕 같은 존재였다고 하고 누구는 화를 내거나 호통을 친 일이 없다고 증언한다. 상하관계에 의한 위력인지 두 사람의 애정 관계였는지 남과 법원이 어떻게 알겠는가. 증인과 증거가 법리적 해석을 위한 자료라지만 사법의 정의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지금, 법원이 어떠한 판결을 해도 못내 개운치 않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남녀 간의 성 대결과 남자 혐오, 여자 혐오를 부추기고 그 끝은 국민의 분열이다.

공인이 한방에 훅 가는 일은 과거에도 허다했고, 현재도 벌어지며 미래에도 가능할 일이다. #Me_Too뿐 아니라 어떤 사안으로든 훅 갈 가능성이 크다. 인성과 철학을 기본으로 매사에 자기를 엄격하게 다루고 감정과 욕망에 매정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마음 놓을 수가 없다. 그는 이점을 간과했다.

미투의 고발 대상이 아니라고, 부당한 금품 수수를 해 본 적이 없다고, 정치인이 아니라고, 공인이 아니라고, 누가 누구에게 당당히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단 한 번이라도, 양심과 도덕과 인간성과 인격을 위배하는 행위를 한 적은 없는가, 반성해 볼 일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이치와 밟힐수록 강해지는 잡초의 순수한 근성은 변함없는데 사람만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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