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 낡은 반복으로부터…. 굳이 늙은 시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피해 뱀허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한 여름엔 그늘진 곳만 있어도 살만하다. 바람이 파도처럼 계곡을 휩쓸고 뺨을 스쳐가니 무량하다. 폭염이 계속될수록 숲속은 더욱 귀한 대접을 받는다.

발밑에서 두런거리는 흙의 기운이 삼삼하다. 할머니가 일어설 때마다 치마에서 나던 그 냄새다. 숲과 폭포, 계곡의 물가에서 쏟아지는 음이온을 들이마신다. 테르펜이라고 했던가. 소나무나 잣나무, 편백나무 등 바늘잎나무에 많이 들어있는 성분인데 마음을 안정시키고 스트레스를 없애준다. 식물들이 다른 미생물로부터 자기 몸을 방어하고자 식물성 살균물질인 피톤치드를 내뿜는 것이 인간들에겐 축복이 된다.

숲에서 숲을 본다. 나는 수천 년을 살아온 숲의 비밀을 알 리 없고, 숲 또한 그 비밀을 이야기 하지 않지만 자연은 정직하다. 천기누설 하지 않아도 오감으로 끼쳐온다. 가슬가슬한 붉은 껍질의 촉감을 통해서,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느껴져 오는 내밀함 속에서, 날숨과 들숨의 매 순간마다 엄청난 세월의 무게와 신화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 같다.

희끗희끗한 바위를 비집고 솟아난 소나무를 본다. 생명은 질기고 위대하다. 바위에 올라앉아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기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탁족(濯足)을 하던 옛 선비들의 지혜가 아른거린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순수의 맛, 원시의 맛을 즐겼을 것이다. 시를 읊고 노래를 하며 서두르지 않되 결코 뒷걸음질 치지 않는 삶의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자연과 함께 감각을 통해서 느끼는 정서적 교감은 값지다.

여름 숲에서 산초의 향, 산초의 맛을 느껴보았는가. 산초나무는 소나무나 참나무 등 크고 굵은 나무들의 숲 속에서 자란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비린내가 끼쳐오면 주변을 두리번거려라. 산초나무가 있을 것이며 붉게 빛나는 산초열매가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꽃은 산방 꽃차례로 달려 하얗게 피어난다. 꽃이 지면 푸른 열매가 검붉게 변한다. 기름을 짜서 비빔밥이나 두부 부침에 사용하면 별미가 따로 없다. 잎은 장아찌로 해 먹고, 줄기는 젓가락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달거리 노래인 고려가요 <동동>에 “12월 분디나무로 깎은, 아, 소반의 젓가락 같구나. 님의 앞에 들어 가지런히 놓으니, 손님이 가져가는구나. 아으 동동다리….”라고 노래했는데, 분디나무가 바로 산초나무다.

게르만 민족은 숲이라는 단어를 성소(聖所)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재촉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어쭙잖은 지식의 잣대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판단했던 지난날이 안쓰럽다.

다시 석양이 깔린 도시의 풍경을 본다. 온 도시가 푹푹 찐다. 나 어찌 살라는 것이냐며 절규하는 것 같다. 삶의 향기는 그냥 오지 않는다. 지혜와 성심이 있어야 한다. 한 땀 한 땀 자신의 삶과 꿈을 깁고 누비며 삶에 젖도록 할 때 불멸의 향기로 다가올 것이다. 떠남에도 지쳤지만 또 떠나야 한다. 현실에 안주할수록 몸과 마음이 느슨하다. 고단하더라도 떠나야 한다. 돌아올 곳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이 떠남이 무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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