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뜨겁다. 용광로가 이런 것 일까 싶은데 그는 오히려 시원하다며 등짝을 쭉 펴고 기대어 앉는다. 에어컨을 켤 생각은커녕 창문도 닫은 채 아예 눈을 지그시 감는다. 백 여 년 만의 무더위라는데 오히려 즐기는 듯하다.오래된 서양음악을 주로 듣던 그가 어느 날 부터 그만큼 묵은 한국음악을 밤낮없이 들려주었었다. 어느새 취향이 바뀌었는지 종교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다만 로숀을 듬뿍 바른 손으로 내 몸을 만지면 은은한 향기와 보드라운 촉감이 싫지 않다.

사실 그가 나의 부속품쯤으로 여겼는데 어느 날 문득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날부터 그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었다. 한참 음악을 듣던 그의 엉덩이 쪽에서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다. 상쾌하지 않은 냄새가 폴폴 올라온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콧노래를 부른다. 경망스러움에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라디오의 진행자가 사연을 읽어 주거나 시를 낭송해주면 흉내 내는 모습은 혼자보기 아까운 그림이다. 흥이 오르면 가끔 노래도 따라 부른다. 소음공해라 할 정도로 지독한 음치다. 한손은 나의 허리춤을 꽉 쥐고 나머지 한손은 엇박자로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다. 조금은 자아도취에 빠진 모습이다. 소극적인 그가 이런 행동을 할 땐 코미디가 따로 없다.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약간은 변덕스런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다양한 목소리로 받는다. 보험회사나 물건을 판매할 목적인 듯 하면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한다. 남편이나 아이들의 전화에는 애교를 듬뿍 담고 문우와는 점잔을 뺀다. 양가 어머니는 아기 대하듯이 하고 친구와는 다정다감과 푼수 끼를 오간다. 다중인격의 진수다. 이중 특별히 좋아하는 모습은 없지만 심심할 땐 그런대로 볼만하다.

그러나 가끔 우울한 공기가 그의 가슴 밭에 내리는 날이 있다. 숨소리만 들어도 외로움의 깊이가 얼마만큼 인지 느껴진다. 주문 같은 기도가 그의 입술을 새어나오다가 결국 더운 눈물이 내 몸을 적시기도 한다.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다만 볼륨을 높이고 속력을 내어도 핀잔 없이 따라주는 것뿐이다.

사실 나는 좀 더 젊고 용감한 사람을 만나길 원했었다. 전국방방곡곡을 여행하며 기행수필을 쓰거나 사진기 하나 달랑 들고 출사를 나가는 사람이길 기대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중년의 그를 만났다. 처음에는 실망스럽고 어색했지만 나도 모르게 닮아간다. 우유부단하지만 나름 섬세한 그와 몸은 다르지만 한 영혼이 깃든 것처럼 지내게 되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겨우 한 시간 남짓 함께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인간적이며 솔직한 모습을 본다. 그와 지란지교를 꿈꾸어 본다.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난 그에게 세 번째 자동차의 운전대란다. 그는 얼마지 않아 나를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날세고 우아하기 까지 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오늘처럼 뜨거워 견딜 수 없을 만큼 열열이 사랑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포로가 되어버린 나는 그를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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