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련 사회복지사

[정혜련 사회복지사] 뜻을 세우고, 작지만 나만의 꿈을 꾸며,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생각하며 살고 싶은 소시민의 희망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공정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특히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 첫 발을 내딛은 젊은이들이나 내가 속한 조직이 공정하고 다수를 위해 건강하게 운영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더욱 지치고 힘들 것이다. 함께 뜻을 같이하는 동료라도 있으면 모를까, 때로는 정직하게 얘기했다가 비난을 듣거나 고립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현실이 아닌 진실에 의해 바뀌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1545년 한성부 건천동(지금의 서울 청계전과 남산 사이)에서 이순신은 한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세계의 역사에 전례 없던 기적의 3대 해전을 이끈 이순신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결단의 시간들이었다. 중앙의 훈련원 봉사로 재직할 때 병조정랑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는 것을 반대하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좌천되었다. 전라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수군만호인 이순신의 평가절하 하였다. 지금의 우리로 말하자면 근무평점을 낮게 준 것이다.

이후 군기경차관으로 부임한 서익이 조정에 이순신을 근무태만이라고 거짓상소를 하여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 이후 첫 번째 백의종군하게 된다. 때로는 장형을 맞기도 하였다. 해전에서 목숨 걸고 싸우며 승리하던 이순신을 모함하는 상소가 올라오고 화가 난 선조는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펄펄 뛰었다. 명량해전으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곤장을 맞고 고문을 당했다. 백의종군은 물론이려니와 옥고까지 치러야 했다.

지금 같은 민주사회가 아닌 폐쇄적인 국왕체제였으니, 공명정대함을 기대하기는 더 어려웠을 것이다. 시대는 다르나, 정의를 위해 치루는 대가가 만만한 것이 아니며, 만약 당신도 그러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순신장군은 나를 둘러싼 삶과 조직에서 불의에 맞서 내린 결단들로 자신을 훈련시키고,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외세의 침입에서 국가를 지켜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가 바로 『일성호가』 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 남의 애를 끊나니. 우리는 일생을 살며 많은 날들을 타인에게 배신당하고 모욕당하고 괴로움을 겪고,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배신하고 모욕하고 실망시킬 때이다. 내 손에 있는 것 중 어떤 것을 내놓을 지는 나의 선택이지만, 오늘 하루 안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쌓일 때는 강력하고 어떤 것도 부서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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