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음양을 조화시켜 새로움을 다진다'는 종소리를 '천국의 소리'에 비유한다. 요즘들어 부쩍 교과지도 보다 몇 배나 어려운 생활문제가 학교종소리를 그립게 만든다. 전교생을 움직이던 '땡땡땡' 단순박자는 희망과 활기의 시그널이었다. 그 종(鐘) 모습도 박물관 골동품으로나 만난다. 최근 충북지역 10대 여고생이 집단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투신 사망한 사건에 이어 음주 상태의 여중생 3명은 승용차를 빼앗아 25m쯤 겁 없이 달리는 사고를 쳤다. 참으로 당혹스럽다. 왜 그랬을까?

두 유형 모두 또래집단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영웅 심리 도취 · 절제력 상실이 원인일 수 있다. 기성세대는 여러 형제나 친구와 어울려 다투고 풀면서 자랐다. 그러나 자아를 형성해갈 생각과 관찰이 '검색'으로 대체되고 관계 맺기와 체험마저 '접속'으로 변환된 온라인 세계가 똬리를 틀어 부실한 인간을 만드는 현실이다. 방송프로그램 조차 비속어로 시시덕거려 인성에 흠집을 부추긴다.

학교폭력예방 대책위원회 지구대 소속 경찰위원 등 보호 손길도 다양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학생에겐 선생님이 최고다. 경찰관 앞에선 막무가내던 아이도 선생님만 나타나면 금방 수그러든다. 그렇다고 교육 주체들이 배제된 채 생전 듣고 보지 못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몰려와 뚝딱 해결할 것처럼, 현장과 너무 먼 대안으로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정작 학교 울타리 안의 차분한 대응에 맞불처럼 '뭣들하고 앉았느냐?' 국민청원까지 쏟아지고 있다.

예방과 근절을 위한 사회분위기야 바람직하지만 그걸 미끼로 오히려 교권의 깊은 간섭과 학교를 밟는 또 하나의 빌미와 전혀 무관할지 두렵다. 이럴 때 일수록 허울 좋은 겉치레가 아니라  신중한 접근으로 선생님 체온이 학생 개개인을 스며야 한다. 물론, 폭력에 대한 응분의 조치는 교육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면 오히려 흉부가 악화되기 쉽다. '백년지 대계'란 오랜 기다림의 답을 4지 선다형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처럼.

가해학생에 대한 징계와 처벌보다 교육적 접근이 먼저다. 전문가의 얘기처럼 자칫, 지도를 건너 뛴 책임회피의 탈출구로 전락이 우려된다. '학교에서도 강한 제재까지 가능하도록 법 개정을 서두르라'는 주문도 터진다. 그러나 가해자 중 같은 학교 같은 학년 비율이 70%(2017년 통계)에 이른다. 무조건 법부터 인용하다 보면 더 큰 제2 제3의 일탈은 불보 듯하다.

종일 읽고 쓰며 대회에서 상을 받아야 제대로 된 교육인줄 아는 부모 인식이 더 큰 문제'란  선생님들 솔직 고백을 듣는다. 지금 겪고 있는 병증 역시 지나친 기대를 지적한다. 일회성 이벤트로 틈을 메워보려는 건 지나친 현실도피다. 어울리고 부닥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실체가 빠진 학교폭력·인성교육의 숫자놀음 역시 효과와 무관하다. 청소년 건강 정신을 부활할 일상의 재구성, 시효 없는 항구적 가늠자 아닐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