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무엇을 할지 망설일 때, 삶에 지쳐 몸과 마음 모두 부려놓고 싶을 때, 심드렁한 마음에 게으름 피울 때 제일 먼저 나의 두 손이 멋쩍은 표정을 한다. “주인님,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인가요? 나 어쩌란 말입니까?”라며 두 개의 손바닥과 손등이, 열 개의 손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미안해 갈피를 못 잡는다. “난들 이러고 싶겠느냐, 나도 내 맘 같지 않다”며 투정부리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그래서 손톱을 깎으며, 손을 씻으며, 손바닥과 손등을 비비며 너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 나는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너는 나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만 하지 않았던가.

늙고 병든 어머니의 두 손을 보듬으며 당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따뜻한 온기를 전해 준 것도 네가 아니던가. 하루 세끼 황홀한 여행을 허락한 것도, 예쁜 딸들의 볼을 어루만져준 것도, 하늘을 나는 새와 빛나는 별과 눈부신 아침과 오종종 예쁜 꽃을 향해 손을 흔든 것도 네가 아니던가.

사랑하는 그대의 손을 잡은 것도 너였고 책장을 넘긴 것도, 무대를 향해 박수를 친 것도, 친구와 함께 건배를 외치며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제일 먼저 쥔 것도 너였다. 부지깽이를 들고 신작로와 뒷동산을 바람처럼 햇살처럼 뛰어다니던 어린 추억도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누런 콧물을 닦아내던 것도, 춥고 배고픈 설움에 쏟아지는 눈물을 훔친 것도, 그날 저녁 해질녘에 참외서리를 한 것도, 뒷밭에서 똥을 싸고 깻잎으로 똥구멍을 닦을 때 진동하는 냄새를 맡으며 침을 뱉은 것도 너였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고 세수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도, 은행에서 침 발라가면 지폐를 센 것도, 돈 빌리기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구걸한 것도, 몽당연필 꾹꾹 눌러가며 사랑의 편지를 쓴 것도, 책장을 넘긴 것도,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께 회초리로 맞은 것도, 첫사랑의 달콤한 추억도, 빛나는 하루를 시작한 것도, 북풍한설의 추위에 살갗 부르트는 성장통을 겪은 것 또한 네가 아니던가.

오늘 문득 굳은살이 박인 나의 두 손을, 열 개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내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너. 자나 깨나, 추우나 더우나, 좋든 싫든 언제나 내 삶의 최전선에서 목표를 향해 묵묵히 주어진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늘 만지고 다듬으며 보듬는 손이지만 오늘은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나의 두 손에, 열 개의 손가락에 내 삶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성당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눈물을 훔친 것도, 아프지 않게 해 달라고, 아프더라도 조금만 아프게 해 달라고 애원한 것도, 길거리에서 쓰러진 악동을 일으켜 세운 것도,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서 풀을 뽑고 새싹을 키우며 생명의 위대함을 찬미한 것도 너였다. 너는 언제나 어디서나 내가 가는 그곳에 있었고, 내 마음에 있었으며, 비루한 삶의 중심에 있었다.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조차 사치라는 것을 왜 모르겠냐만 그래도 고맙다. 사랑한다. 오늘은 정말로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남은 날은 너를 위한 여백을 만들어야겠다. 부끄럽지 않은 삶, 후회하지 않는 삶, 내 두 손에 삶의 향기 가득하도록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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