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김영애 수필가] 가을이다. 우수수 떨어져 쌓이는 낙엽만큼이나 이런 저런 상념이 쌓이는 계절이다. 봄에는 그리움이 꿈틀거려서 심란했었다면 가을은 사랑과 이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우수의 계절이다.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을 보면서 그 빛깔만큼이나 뜨겁게 사랑했었던 기억과 속절없이 떨어져서 이리저리 뒤척이는 낙엽처럼 아픈 이별들에 대해서 반추하게 된다. 봄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 곁에 머물다 지나가듯이 삶의 여정도 때로는 뜨겁게 혹은 시들하게 달콤하게도 씁쓸하게도 수많은 간이역들을 지나면서 흘러간다.

가을은 맞이하기 보다는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이 많은 계절 앞에서 돌이켜 보니 많은 이별들을 하면서 살았다. 어떤 이별은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당당히 그 이별과 맞서기도 했었다. 시간이 가면서 그렇게 쿨하게 잊어지고 묻혀 지는 이별도 있었지만 가슴 한편에 오래 남아서 문득문득 나를 괴롭히는 이별이 있다. 가을만 되면 그 어떤 이별이 내 발목을 잡는다. 늦은 가을 낙엽이 발에 채이고 밟힐 때면 그 시간 그 세월의 어귀에다 나를 데려다 놓게 된다.

어느덧 십 여 년이 지났다. 이른 추위가 왔었던 그해 늦은 가을에 나는 누추한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이사를 갈 때마다 나의 살림살이는 단출해져갔다. 거실 한쪽에서 가족사진을 장식하고 있었던 멋진 콘솔은 올케가 가져가고 꽃 수반을 머리에 늘 받쳐 들고 있었던 키가 큰 소녀조각상은 여동생 집으로 갔다. 현관문 양쪽에서 수호신처럼 떡하니 지키던 덩치 큰 코끼리들은 동생 집 현관을 지키러갔다. 그렇게 보내고 버리기도 하니 이삿짐 이라고는 가재도구 몇 가지와 강아지였었다.

이사 갈 집에 줄자를 가지고 가서 몇 번을 재고 또 재보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묘안이 없다. 함께 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버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가난해서 자식을 다 데리고 가지 못하고 누군가는 떼어놓고 가야하는 심정이랄까! 어떤 이별 보다 슬프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 함께 했었던 시간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쓰다듬어도 보며 어루만져 보기도 했다. 연미색 클랙 가구로 열두 자 장롱을 들여놓을 때가 삼십 여 년 전 이었다. 제일 넓은 평수의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가구를 들여 놓고 아름답게 집을 꾸미던 시간이 흑백영화같이 떠올랐다.

좁은 평수로 이사를 가면서 장롱 세통 중에 한통은 버리고 가야했다. 그 장롱 속에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사진첩과 아들의 배냇저고리까지 우리 가족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사 가는 날  찬바람 부는 주택가 골목 어귀에다 폐품이라는 노란 딱지를 붙여서 버렸다. 한때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방마님처럼 큰방을 차지했었다. 한 번도 밖의 세상 구경을 한 적도 없었는데 버려진 채로 비바람 맞으며 서있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왔었다. 눈에 밟혀서 한동안 잠을 설쳤었다. 두고두고 그 슬픈 이별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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