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처디자이너·에세이스트] 가을비가 오는 날 붉게 익어가는 들녘을 보며, 흩날리는 단풍을 보며 시를 읽는다. 바람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고 빗방울이 가슴을 치면 서럽고 쓸쓸해서 눈물이 난다. 그래서 가을엔 시를 읽는다. 김영랑은 깊어가는 가을볕 앞에서 "오-매 단풍 들것네"라며 그리움 가득한 누이의 연정을 노래했다. 조지훈 시인은 지는 꽃, 가는 계절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며 서럽고 쓸쓸한 삶의 가락을 이야기했다.

김현승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며 플라타너스 길을 걸었다. 그리고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고 했다. 최영미 시인은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꽃이 지는 건 쉬어도 잊는 것은 한참이더군"이라며 산사의 풍경을, 안도현 시인은 "빗줄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와서…. 부엌에서 밥 끓는 냄새가 툇마루로 기어 올랐다"며 저녁 한 상 차리며 들려오는 마당의 빗소리를 투구 쓴 군사들의 발소리 닮았다고 했다.

이재무는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구멍 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며 남겨진 가을의 무상함을 노래했다. 신경림은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며 갈대가 되어, 갈대처럼 울고 싶다고 했다.

도종환 시인은 "고개를 넘어오니, 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 물에 던지며 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느냐는 내 말에, 가을은 시든 국화 빛 얼굴을 하고, 입가로만 살짝 웃었다"고 했다. 김관식 시인은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보다"라며 우울한 음화를 가슴에 새겼다.

가을도 깊어간다. 끝자락에 다다랐는지 아침과 저녁으로 바람이 차다. 설악산에 오방색 단풍 가득한가 싶더니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백석 시인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고 했는데 겨울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처럼 사랑하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슴 시리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그 길을 걷기, 내 가슴에 시 한 편 꽃피우기, 꽃으로 불멸의 향기 가득한 삶을 만들기….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 하늘 한 번 보고 시를 읽고, 지는 단풍을 온 몸으로 비비며 시를 쓴다. "가을비가 오는 날, 빗소리 요란한 처마 밑에 앉아, 오지 않는 그대 그리워하며 노래를 한다. 또 하루가 가고 하루가 오는데, 들녘은 무르익고, 자연은 해탈의 비명으로 가득한데, 나의 사랑, 나의 일만 정처 없으니, 이 모든 것 부려놓고 바람의 집을 짓자. 떠날 때 떠나고 쉴 때 쉬며 사랑하는 자유의 집, 영혼의 집을 짓자…." 깊어가는 가을, 시인이 되어 시를 읽고, 시를 쓰며, 시심에 젖고 스미며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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