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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파먹고 살았네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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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12  16: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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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감자를 샀다. 자잘해서 한입 크기로 딱 맞는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감자 까는 기구로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조림용보다는 약간 큰 정도. 그러다 보니 두어 번 쪄 먹고는 한동안 그냥 보관만 해두고 있었다. 감자가 다시 먹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볕 바른 거실에 앉아 감자를 깠다. 비들비들 마르고 숨구멍에 조금씩 감자 싹이 생기기도 했지만, 겉이 멀쩡하니 잘 다듬어서 쪘다. 한입에 감자를 베어 물자 물컹해서 깜짝 놀랐다. 다시 반으로 쪼개 보았더니 세상에나, 감자 가운데 속이 비었다. 겹겹 빵, 크루아상처럼 감자가 겹겹이 찢어졌다.

생활이 어렵던 젊은 시절, 귀한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톱밥 속 활게 한 상자를 받았다. 대여섯 마리 정도인데 그걸 한 번에 해 먹기가 아까워서 두어 마리 해 먹고 뒤 베란다에 모셔두었다. 며칠쯤 지나 상자를 열었더니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게를 보고는 중요한 날에 요리하기로 하고 며칠을 더 두었다. 그리고 갑자기 술손님을 데려온 남편 친구에게 고급 요리를 내리라 하고 꽃게찜을 준비했다. 살아 있는 것의 싱싱함을 기대했다. 아뿔싸. 껍질뿐인 꽃게를 보며 눈물이 났다. 톱밥 속에서 꽃게는 자신의 살을 모두 다 파먹고 견디어냈다. 생명만 붙어 있을 뿐.

가끔은 나도 속을 파먹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잠이라는 쉼표를 제대로 찍지 못하고 허둥대며 사는 주간에는 먹어도 허기가 진다. 그릇도 비워야 새로운 것이 담기는데 내 마음 안에는 오만가지 상념과 잡다한 계획으로 꽉 차 있는 느낌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목욕탕엘 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밀어 넣으며 생각도 물에 담갔다. 맑은 물에 빨래를 헹구듯 사소한 일거리들을 하나씩 들추었다. 적당히 고장 난 풍향계처럼 살아도 될 터인데 너무나 많은 바람에 몸을 맡긴듯하다. 굳이 나이 탓을 하지 않더라도 넘치는 역할로 소진되어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도록 감자가 말했다. 땀을 쏟으며 쉬고 나오니 봄날 물오른 이파리 같다. 한 끼쯤 걸러도 너끈한 날이다. 먹는 것과 쉬는 것 둘 다 같은 무게라는 것을 경험한다.

요즘, 일과 가정의 밸런스를 얘기하는 워라벨이 대세다. 맞장구를 치면서도 사무실을 쉬이 못 떠난다. 남편이 저녁 약속이 있어서 늦는다는 말을 하면, 퇴근을 늦추거나 다른 약속을 잡는다. 일중독 증세를 보인다는 말을 가벼이 여길 일을 아니다. 그러나 내내 이렇게 살아온 습관을 어찌할까. 어떤 날은 고속도로를 달리듯 속도에만 집중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호젓한 산길을 가듯 느릿느릿 여유 있을 때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인생이라는 길을 가며 임계점을 넘어서는 과속의 날들 덕분에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살 달래가며 가야 한다는 것을 요즘 부쩍 느낀다. 몸이 말을 해준다. 제 살 파먹지 말고 여분으로 살아가라고. 그래서 이번 주는 강원도로 단풍 구경 가는 모임에 낀다. 어쩌면 이것이 힘겨운 일정표가 되어 기진하더라도, 버스 안에서 단풍 보다가 졸다가, 그렇게 느긋하게 새 살 만들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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