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서울의 청와대 뒤편 북악산(원래 이름 백악산)에 가면 이른바 '김신조 루트'가 있다. 1968년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 소속 무장병력이 청와대를 노리고 침투했다 우리 경찰과 격전을 벌린 뒤 도주했던 길이다. 그곳 북악산 등산로와 한양도성 인근에는 수십 발의 총탄 자국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무와 바위의 총탄 자국엔 흰색과 붉은색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페인트 색깔이 너무 원색적이어서 조금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면 당시의 끔찍한 상황이 떠오르고 나아가 분단의 비극까지 생각하게 된다. 바로 흔적의 소중함이다. 흔적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기억한다.

우리 정부와 북한은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 GP를 시범 철수하기로 한 '남북 9·19 군사합의서'에 따라 현재 GP를 철거하고 있다. 시범철거 대상은 상호 1km 거리 이내에 있는 남쪽 GP 11곳과 북쪽 GP 11곳이다. 남북은 그 가운데 하나씩을 보존하기로 했다. 우리가 보존하는 것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후 처음 설치된 동부전선 동해안 GP이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3년 6월 방문했던 중부 전선의 까칠봉 GP를 보존한다.

 비무장지대 GP는 20세기 격변의 역사,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는 중요하고 상징적인 흔적이다. 현재 남쪽에 80여 개, 북쪽에 160여 개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무시무시한 전투 시설이지만 50년, 100년이 흐르면 소중한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비무장지대 GP를 미래유산, 근대문화유산이라 불러야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중 20개가 이번 철거 작업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남북의 GP 철거 합의는 한반도 평화를 향한 담대한 발걸음이 아닐 수 없다. 마땅히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철거 과정을 보면 아쉬움이 크다. 최전방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GP는 각 지역마다 설치 과정, 그 의미와 존재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철거하기 전에 국방 및 전사(戰史) 연구자, 문화유산 전문가, 환경 전문가 등 관계자들이 모여 남쪽 GP 80여 개를 놓고 그 의미와 가치 등을 조사 평가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도면, 사진 등 관련 데이터도 작성해놓고 그런 다음에 보존 대상과 철거 대상을 가려내는 것이 합당한 절차였다. GP 철거의 상징성을 부각하는데 집중하다보니 서둘러 건물을 철거했고 그렇다보니 결국 소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한 것이다.

시범 철거가 완료된 뒤에도 언젠가 비무장지대 GP 철거는 다시 이뤄질 것이다. 분단 극복과 통일로 가는 불가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철거작업 자체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철거의 의미와 상징성을 국민들과 공유하되 철거는 천천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철거하지 않은 GP는 여러 의견을 모아 나중에 철거해도 된다. 하지만 지금 철거한 GP는 나중에 되살릴 수 없다. 그것이 역사의 흔적이고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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