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무대에 선 그를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닌데 복잡한 감정들이 회오리를 친다. 드디어 막이 열린다. 어둠속에서 한줄기 조명만이 그를 비춘다. 익숙했던 얼굴이 낯설다. 첫 곡은 '상령산'이다.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조곡이다. 산을 오르기 전 몸을 풀고 마음속에 담긴 상념을 지우며 상서로운 것들을 무한으로 받아 드릴 준비를 하는 곡이란다. 이것은 마치 처음 우린 차(茶)물을 버리지 않고 마시는 것처럼 진하지 않으며 옅은 향기가 입안에 머문다.

두 번째 곡은 '창성자진한잎'이다. 고종 때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과 효명세자 익종에게 관례를 올린 60주기를 경축하는 잔치에 연주된 곡이다. 예를 갖추는데 연주된 곡이어선지 격식에 맞는 운율이 느껴진다. 산을 오를 적에 지치지 않는 호흡법을 가르치는 듯한 형식이다. 한번 물이 지나간 차 잎에 따뜻한 물을 부어 좀 더 풍부한 맛을 내어 그윽한 향기가 입 안에 배는 듯하다.

다음 무대는 '원 장현 류 대금 산조'이다. 정상에 올라 흐른 땀을 식히며 풍류를 즐기는 곡이다. 사계절의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주듯 연주하며 오르고 내림의 뚜렷한 구성을 갖추고 있는 특징이 있는 곡이라 한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인 오욕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중적인 곡이기도 하다. 욕망과 희로애락이 신들린 듯 연주되고 천천히 찻잎을 우려내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며 그 향기가 온 몸과 영혼까지 목욕하는 느낌이다. 연주자와 객석이 함께 호흡하는 절정의 순간이다. 그래선지 문외한인 이 사람도 섬세한 감정들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뜨거운 것들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 왔다. 감출 새도 없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지막 곡은 공감 '시나위 춤 산조'이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그리고 장고가 만나 한판 벌이는 것이다. 산의 정상에 올라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듯 자신들의 악기로 표현한다. 정해지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짜여 지지 않은 상태에서 밀고 당기는 합주곡이다. 차를 마시고 난 후 한쪽으로 미루어 두었다가 찻주전자에 배인 찻물이 마르고, 어느 날 문득 더운 물을 부어 우리듯이 온전히 나를 비워내는 맛이 느껴진다.

그는 열여덟 꽃다운 청춘에 대금을 만났단다. 그것은 저물어 가는 하늘에 드리운 노을 같았으며 어느 날은 어두웠고 어느 날은 붉고 찬란하였다. 그때는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서른 즈음에 仙을 만나 어둠속에서 무서우나 설레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욕심을 버리고 비우는 삶을 만나게 되었단다.

비우는 삶은 그에게 최고로 잘하는 사람이 아닌 대금과 하나가 되는 명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대금과 함께 한지 삼십년이 된 오늘 무대에 선 명인, 박 노상을 객석에서 만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무대 아래에서 인산인해를 이룬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는 자신을 온전히 비워낸 찻주전자가 아닐까. 그의 손을 잡으며 아직 식지 않은 차 한 잔을 받아 입술을 적시는 나는 쉬이 찻잔을 내려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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