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태 건양대 교수

 

[박기태 건양대 교수] 오랜만에 강변길을 산책한다. 그렇게도 무덥던 여름날 ‘더위사냥’이란 막연함을 가지고 거닐던 때와는 사뭇 색다른 느낌이 든다. 심호흡도 해본다. 강물을 바라보며 들이마시는 숨이라서 그런지 수없이 많은 차들이 스쳐가는 대로변의 그것과는 기분조차 다르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초입이 서로 손을 맞잡으려는 지금 내가 서있는 좁다란 강변길 뒤쪽으로는 여전히 차량행렬이 이어지지만, 그것을 외면하면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니 문든 삼십여 년 전 파리의 센 강에서 바라보던 미라보 다리가 생각난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그의 연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과 헤어진 다음에 우리의 사랑과 삶의 애환을 노래한 「미라보 다리」라는 시를 남겼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우리의 사랑도 흐르는데/나는 기억해야 하는가/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이것은 「미라보 다리」의 첫 연이다.

강물은 흐르지만 우리의 사랑과 삶의 애환은 강물에 흘려보낼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더욱더 끈끈한 인연을 다지기라도 하듯 우리를 거기 그냥 오래 붙박혀 있게끔 만드는 듯하다. 하지만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며 눈비가 내려도 우리의 삶이란 거대한 물결 앞에서 어떤 운명이 주어질지라도 꿋꿋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야한다. 그래서 나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다시 노래한다. 그 시구 중에서도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를 나는 무척 좋아한다.

가파른 길이 끝나면 평탄한 길이 이어지듯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고통이 늘 뒤따르고 그 고통 뒤에는 즐거움이 온다. 세월이 흐르듯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한다. 변하는 것들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듯하다. 그렇지만 그 변하는 것 가운데 확실한 것은 언제나 ‘나’이다.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변하는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아폴리네르가 「미라보 다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 ‘나’인 것이다. 따라서 흐르는 강물을 세월에 비유해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고 시인은 음유한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에는 탑사가 있다. 이 절은 이갑용이라는 처사가 잔돌들을 이용해서 쌓아올린 크고 작은 8 백여 개의 석탑들로 유명하다. 우연한 기회에 보았던 풍경들은 그 후 오래토록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그 탑들에서 받은 기이한 감동을 가끔씩 떠올릴 때가 있다. 특히나 잔돌들을 그 모양새에 따라 빈틈없이 맞추어 쌓아올린 탑이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우리의 사랑과 삶의 애환도 그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랜 시간과 그 시간들을 잔돌삼아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사랑이며 삶의 애환이가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오랜 인고와 함께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가끔씩 삶이 처음부터 ‘완전한 그 무엇으로 온다’는 착각에 섭렵당한 사람들을 본다. 대단한 착각이다. 삶이란 처음부터 즐거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뇌 뒤에 즐거움이 온다고들 하지 않는가? 즐거움이 먼저 오면 또 고뇌가 뒤에 따르듯이 말이다.

우리는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고 서로 아파하기도 하며 때론 고통을 던져 주기도 한다. 고통을 서로 나누면서 또 그것을 보듬으면서 세월 속에 조금씩 조금씩 쌓아올린 사랑과 삶의 애환이 바로 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를 생각을 해본다. 아름답고 진지한 삶일수록 그것은 아마도 마이산의 석탑 같은 모습을 반영하리라는 깊은 생각도 해본다.

저문 하늘 속으로 가라앉는 노을처럼 어느덧 막바지로 기울어가는 올 해도 내 뜨겁던 젊음의 열정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을지 모르겠지만, 지나가 버린 것과 함께 내 삶의 일부분을 끝내기 아쉬워서 사랑과 삶의 애환은 강물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흐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물방울들이 햇빛 속에서 찬란한 무지개 색깔을 내뿜듯이 내 마음에도 무지개가 하나 뜬다는 작은 소망으로 오늘도 나는 또 걷고 걸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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