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숙 수필가

[이향숙 수필가] 지난 가을 문학인 대회에 참여 했을 때이다. 공연이 한창인데 객석 중앙에서 노인이 일어선다. 연신 머리를 숙이며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서야 그 말이 들린다. "고맙습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거나 실례한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내가 지나는 길에 당신이 비켜주어 고맙다는 말이다. 그가 내게 실례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비켜주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어쩐지 고마운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함이 느껴졌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있을까. 의미 없는 인사치레로 느껴질 때가 간혹 있다. 그나마 큰일을 겪고 나면 누군가의 배려를 오랫동안 가슴에 새기고 갚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사소한 일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날 노인의 고맙다는 인사말은 신선하게 느껴지고 쉽사리 잊혀 지지 않는다.

군복무중인 아들의 편지가 도착했다. 훈련병인 아들의 100가지 감사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아침을 맛있게 먹고 동기들과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서,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종교 활동을 하고 다른 종교를 체험 할 수 있어서, 불침번이 아닐 때는 편히 잠잘 수 있고 불침번 일 때는 책임감을 기르고 새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 있어서, 야전 교육대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해군의 역사와 조국의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서,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감사하단다. 담백하며 소소한 일상이 그림처럼 지나간다. 손에 꼭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소박한 감사함이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욕심 때문일까 늘 어두운 그림자와 함께했다. 척박한 광야를 홀로 걷는 나그네의 외로움을 느끼며 내게만 시련을 주시는 것 같아 신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한편으로는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니 그저 크고 달큰한 열매만을 받으려 안간힘을 썼다. 당연히 내 몫이라 여기며 주위를 둘러볼 여유마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의 편지를 받아보니 일상이 선물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높이 올라갈 때 뿐 만 아니라 한없이 내려가는 순간에도 신은 곳곳에 보물찾기 놀이처럼 선물을 숨겨 두었다. 티끌만한 것이라도 찾아내면 기쁨이 되고 진정한 행복이고 고마움이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특히 폭풍우를 만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요즘 들어 정체기에 있는 일터는 일촉즉발의 전쟁터이다.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꿩도 윗 밭에서 콩 한말, 아래 밭에서 팥 한말을 먹으며 비단 옷 입고 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선지 알게 모르게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고마움을 표현하고 서로 기쁘게 받아들이면 조금 더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다. 그날 만났던 노인의 사소한 인사말 같지만 고맙다는 한마디는 내게 겸허하게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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