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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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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2.07  12:4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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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나가 충청대 교수] 며칠 전 아침에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간밤에 SNS로 친구가 보내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와! 대박!!." 거기에는 30대 초반의 나와 아내의 모습이 있었고 그녀의 품에는 갓 태어난 아이가 안겨 있었다. "어머 우리 큰애잖아!" 아내에게 사진을 보여주니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이렇게 젊었구나."라고 혼잣말하듯이 말했다.

1988년 10월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짧은 사회생활을 하다 나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었다. 모두가 새롭고 낯설었다. 기후도 음식도 안 맞아 처음엔 자주 병이 나기도 했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대학을 다녔다. 일본에 계신 부모님께 걱정 끼칠까봐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뎠다. 그리고 그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서울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착하고 귀엽고 순수한 아가씨였다. 운명의 만남이었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됐고 그녀도 마침내 내 마음을 받아줬다. 둘째로 태어난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착하고 효심이 깊은 딸이었다. 장인 장모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아내는 가고 싶었던 대학을 포기하고 대신 전액 장학금을 주는 대학을 택했고 그나마 받은 장학금도 생활비를 빼고서 모두 부모에게 드렸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속을 썩여본 적 없던 아내가 부모 허락도 없이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것도 상대가 일본남자라니. 장인 장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충격에 두 분은 한 동안 앓아누웠었다고 한다. 요즘에야 놀랄 것도 아니지만 국제결혼이 흔치 않은 시대였다. 더군다나 한일 국제결혼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여러 번 가족회의가 열렸고 모두가 우리의 결혼에 반대하고 말렸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조차도 아내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수심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울고불고 겨우 부모를 설득해서 식을 올렸지만 그때서부터 아내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내게 한국에서 살아갈 길을 터주기 위해 대학원에 보내놓고 몇 년을 혼자 돈 벌며 뒷바라지를 했던 아내. 임신했는데 입덧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링거를 맞아가며 일해야 했던 아내. 아버지가 일본사람이라고 애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당할 때다마 마음을 조이면서도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했던 아내. 12년 전에 어머니가, 2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던 아내. 나는 인생의 고비 고비를 아내와 손을 맞잡고 넘어왔다.

"내가 아니면 누가 살피랴 나 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우리가 만난 지 30주년.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고맙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꼭 한 마디 전해주고 싶어서 노래를 불러주려다 쑥스러워서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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