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원 전 언론인

[김종원 전 언론인] 예전 같으면 '핑계거리'가 있었던 일들이 요즘은 그렇지 못하다. 영화제목을 역 패러디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원래 영화 제목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일들이 있다. 우선, 약속장소를 찾지 못해서 약속을 어겼다는 말이 성립 안 된다. 핸드폰 앱에는 각종 지도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내가 있는 위치가 위성으로 검색되고, 목표지점까지 거리, 방향이 모두 나온다. 심지어 산길을 알려주는 앱도 있다. 계룡산 00바위에서 만나자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니, 길을 몰라서, 장소를 찾지 못해서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핑계가 없다. 도착시간까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흔한 시대다.

또 하나, 축의금이나 부의금이다. 예전에는 '부득이 참석도 못하고, 인편도 없어서'라는 말이 통했다. 그런데, 요즘엔 핸드폰 번호만 알면 '돈이 알아서 간다'. 돈 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계좌번호를 몰라도, 핸드폰으로 클릭 몇 번만 하면 송금이 가능하다. 물론, 경조사는 직접 방문하는게 도리다. 다만, 일정이 겹치거나, 친소관계에서 조금 애매하거나 할 때, 과거에는 송금에 어려움을 겪었다. 알고는 지내는 사이지만 같은 조직이나 그룹이 아니고 개별적인 관계일 때, 경조사를 못가게 될 경우 '인편'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리송금'이 어려운 것이다.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심지어 핸드폰 번호조차 모르는 '지인'일지라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 (카000 등)

기술발전으로 인한 생활변화, 문화발전은 지금만 있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로 상징되는 활자 발명을 생각해보자. 활자가 없었던 시대에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크게 각광 받았다. 많은 이야기들이 구전으로 전해져야 했기 때문에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리더' 자격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활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달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이제는 기록이 의미 있는 활동이 된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인쇄물로 인해 사회적 지식이 급격하게 축적되고, 재생산된다.

둔필승총(鈍筆勝聰:둔필의 기록이 총명한 기억보다 낫다)이 대세인 시대로 바뀐 것이다. 정보화 시대인 현재는 어떨까.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21세기의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면서 "산업 사회가 '노하우(Know how)시대'라면 정보화 사회는 '노웨어(know where)시대'라고 갈파했다. 기록을 넘어서서 넘쳐나는 정보를 어디에서 찾고, 취합하며,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기술발전이 가져온 변화에 맞춰 생각의 틀도 바뀌게 된다.

민주주의 발전도 결국 기술발전에서 비롯됐다. 발전하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사회제도도 발전하고 있다. 세계사는 불평등 신분제 계급사회에서 평등한 민주주의로 진전했다. 신분제 계급사회에선 '말도 안 되는' 계급적 차별이 존재했다. 당시엔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신분제 계급사회를 극복한 지금, 아직도 그 당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기술발전은 '못하는 이유'를 줄여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발전 역시 '핑계거리'를 찾아서는 안 된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 그래야 나라다운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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