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낯선 도시에서 서성이듯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앞에서 서성인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랬다. 일상은 늘 그래 왔는데 마지막 남은 날들이 더 크게 들어온다. 낯선 도시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이방인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려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마음구석이 어수선하다. 어느새 사라진 시간들! 분명히 나를 스쳐 지나간 시간들이거늘 지나간 시간들조차 낯설다. 분명 나를 거치지 않고는 지나 갈 수 없는 시간들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빠져 나가는 사이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고만 있었는데 언제 예까지 와 서있는 건지 모르겠다. 손바닥만 한 거울이 얄궂게 일러준다.

흐른 시간들에 대한 거센 반항을 하면서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마로 흐른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다. 부인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그럴 때마다 주체 할 수 없는 마음은 바람결에 흐르는 낙엽을 좇다가 시어 한 다발 품어 안고 달아나는 초야의 바람을 좇는다. 그러다 지치면 소주 한잔에 웃다가 울다가 12월의 거리에서 춤추는 어릿광대가 된다.

수많은 시간의 길을 걸어 이 자리에 머무는 동안 만남과 이별, 시작과 마무리를 연습 이 듯, 아닌 듯 마치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하듯이, 빈 그릇에 무언가를 담았다가 씻어내고 또다시 담고  다시 씻어내기를. 그렇게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의 연속이 우리의 삶이었음을. 우리의 일상은 시작과 마무리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속엔 마음을 가눌 수 없는 만남과 이별도 있다.

12월! 누구 아버지는 화목 보일러 때려고 나무 구하러 갔다가 자신의 시간을 멈추고야 말았다. '기름보일러를 사용했으면……!' 안타까움에 부는 바람소리조차 숨죽인 듯, 세상이 먹먹하다. 보내고 맞이하는 시간 앞에서 작아지는 인생살이! 그 인생살이에서 한치 앞만 볼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은 지금보다 더 나아졌으려는가! 그 아버지의 이순 여 해의 시간들은 순식간에 헝클어졌다. 이제 아버지는 말이 없다. 이제야 모든 걸 내려놓고 바람날게 달고 온천지 산천초목을 훠이훠이 날고 계시려나.

올 겨울바람이 차다. 너무 차다. 태양이 늘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는 일처럼 우리의 삶도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지는 일이다. 그렇게 매일이 시작이고 마무리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었다. 예부터 변함없는 자연의 순리였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늘 잊고 있었다.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크고, 또한 지나고 나니 회한이 그 자리에 머문다. 어제도 내일도 모두 허상이라는 것을. 지금 이순간이 내게 주어진 최상의 시간이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머무는 모든 것들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귀하고, 최선이라는 것을.다사다난 했던 무술년을 보내고 기해년을 맞이하면서 신년엔 모두의 안녕과, 지금 내 곁에 머무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들을 위하여 온 열정을 다한 사랑의 화살을 마음껏 퍼붓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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