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孫秉熙·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일어났다. 충북 역시 곳곳에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펼쳤다.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중 6명을 배출했고 많은 충북출신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충북은 3·1운동 이전 한말 때부터 국권회복을 위해 봉기한 의병항쟁의 진원지이자 격전지였고 충북출신 독립유공자는 2018년 9월 기준 512명이다.

충청일보는 창간 73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충북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널리 알려 도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연중 기획으로 주요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한다.

그 첫 번째로 3·1 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출신 독립운동가들을 알아본다.

충북출신 민족대표 33인은 손병희, 신석구, 신흥식, 권병덕, 권동진, 정춘수 6명이나 변절 후 친일행위를 벌인 정춘수는 제외했다.

 

▲ 손병희 선생

손병희(孫秉熙·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소."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으며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 중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3·1운동 당시 태화관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다.

1882년 동학에 입문, 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았다. 1894년 광제창생·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의 통령(統領)에 임명돼 남접의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한다.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강원도 태백산맥과 원산·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3세 교조로 취임해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그는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권동진·오세창·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 기회를 이용,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을 기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의 의도와는 다르게 시세를 잘못 판단한 이용구가 진보회를 일진회로 바꾸고 일제 앞잡이가 돼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다음해 귀국, 일진회에 가담한 천도교인들에게 탈회해 종교적 활동에 전념케 설득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이용구 등 천도교인 62명을 출교 처분하고 적극적인 포교 활동으로 교세를 키웠다.

▲ 조선소요의 장본인 손병희 보도기사.

이후 선생은 국권을 수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민족계몽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출판사 '보성사'를 만들고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수십개의 학교를 인수·신설해 교육사업에 공헌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해 협의했다.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해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됐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그는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해 승낙을 받았다.

28일 재동(齋洞)의 자기 집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소를 인사동에 있는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해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했다.

3월 1일 오후 2시쯤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했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해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됐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돼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됐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손병희 선생 유허지.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