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숙 수필가

 

[육정숙 수필가] 한해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던 새해 첫날! 짙은 어둠을 헤치고 솟아오르던 거대한 둥근 물체는 포효하듯 찬란한 빛을 쏟아냈다. 그 순간 내 가슴속에서도 무언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맞이를 하면서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새해가 시작 되었다. 그런데 달력은 어느새 삼월이다. 12장의 달력 중 2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나간 시간들이 기억조차 없다. 지금 까지 어디에 있었던 건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했어야 했었는지 혼란스럽다. 다만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시간의 그림자에 쫓기고 있었다는 건 분명하다. 매일 아침 동동 거리며 거리로 달려 나갔고 자동차에 주유를 5일 마다 꼬박 꼬박 넣어주고 받은 영수증이 책상서랍에 쌓여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제 삼월이다. 바람도 온화해지고 두꺼운 외투도 내려놓으니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다. 한가한 듯 오랜만에 거리를 나섰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대신 미세먼지가 반가운 듯 기침을 부른다. 갑갑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했다. 어둑해지는 동네 골목길을 교회의 십자가가 반짝반짝 밝혀준다. 노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노모는 결국 요양원으로 가셨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아파트들은 마치 작은 상자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듯하다. 똑같은 창문에 벽 색깔도 똑 같다. 보이지는 않지만 먹고 사는 일들이 일률적인 아파트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도 며느리도 딸도 모두 출근하고 없는 아파트에 혼자 누워계시는 것보다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분들이 모여 있는 요양원이 나을지도 모른다. 옆 호 어르신도 지인의 모친도 그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위안을 받는다.

7층 아파트에 지금 막 불이 켜졌다. 누가 사는지는 모르지만 가족들을 위해 분주하게 저녁만찬을 준비 하거나, 아니면 하루의 노곤함으로 그냥 쓰러져 누워 있거나, 어쩌면 하루의 마무리를 김치 하나 놓고 저녁 한 끼를 때우거나, 퇴근길에 사 가지고 온 피자 한 조각을 즐기거나.

해도 서산으로 사라지고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인지라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다. 도로의 차들도 빠르게 오간다. 미세먼지 가득한 이 거리에 서서 세상을 본다. 이 도로, 즐비하게 서 있는 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는 불과 얼마 전까지 논밭이었고 울 너머로 정이 오가던 동네였다. 격세지감에 가슴속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 뚫렸다. 그 시절 노모는 부지런하셨다.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이맘때면 장을 담그시느라 하얀 앞치마를 두르셨다.

어느새 밤거리는 쇼윈도의 멋진 쇼로 화려 해졌다. 날이 저무니 아직은 날씨가 춥다. 옷깃을 여미고는 서둘러 보금자리로 향하는 길에 빵 가게를 들렸다. 작은 식빵봉지 하나 들고 생의 시간을 바지런히 걸어간다. 구강세포가 모두 헐어서 식사를 잘 못하시는데 노모는 오늘 저녁은 드셨을까!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변명을 앞세우고 그저 생각만 하는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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