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유석현 (劉錫鉉·1900년 5월 14일~1987년 8월 28일)

 

충북 충주시 교현동서 출생
김봉원 권유로 의열단 입단
1923년 2월 무기반입 모의
총독부 등 파괴 계획했으나
황옥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체포
광복 후 광복회 고문·회장 역임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유석현 선생(사진)은 의열단에 입단해 김시현, 황옥, 김지섭 등 동지들과 전국적으로 대폭동과 요인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사전 탄로로 체포돼 징역 8년을 복역했다. 

유석현 선생은 충북 충주시 교현동 330번지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간이농업학교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유자명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유석혁은 유자명의 독립사상에 깊이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 같은 해 11월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건너갔다.

김원봉의 권유로 1920년 7월 중국 톈진(天津)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했다.

북경대학교에서 공부하며 학생 신분을 이용해 중국와 국내를 오가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2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12월 김지섭(金祉燮)·윤병구(尹炳求) 등과 함께 총독 및 일제고관의 처단과 총독부·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할 것을 협의했다. 

12월 23일 동지들과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를 방문해 군자금 5만원을 요구했다가 2000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12월 25일 밤 윤병구와 함께 약속된 군자금 수령을 위해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백윤화의 신고로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에 윤병구는 붙잡히고 유석현은 탈출했다.

군자금 모금에 실패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5월을 기해 전국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 계획은 논의를 거쳐 3월 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경찰서·재판소·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는 것으로 확정됐고 이를 위한 폭탄의 국내 반입 작전이 시작됐다.

선생은 김시현(金始顯)·황옥(黃鈺)·김지섭 등 동지를 규합해 국내에서 일제 기관의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년 2월 국내로의 무기반입을 모의하고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000매를 휴대하고 북경(北京)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해 3월 15일을 기해 총독부·경찰서·재판소·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 등을 파괴할 거사를 계획했으나 황옥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총독부에서는 밀정정책의 일환으로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가 한인 경부(警部) 황옥을 상하이(上海)에 밀파해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의 회의내용을 정탐하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밀탐해 기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경찰은 황옥의 정보 제공으로 계획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거에 전원을 붙잡아 투옥할 수 있었다. 

선생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출옥해 1941년 다시 동삼성으로 건너갔다. 

광복 후 광복회(光復會)의 고문과 광복회장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석현 등 충북 충주 출신 독립유공자 38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 공원에 세워진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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