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명상 (李明相·미상~1909년)

을사조약 늑결에 의병 투쟁 전개 결의
군사 이진하·중군장 김규철 등 의진 정비
경북 영주군 순흥면서 적 탄환 맞고 순국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충청일보 배명식기자]  이명상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해 호좌의진 이강년부대의 청풍 단양 장의장으로 활약한 후기 의병장이다. 

그는 충북도 단양군 적성면 하진리 출신이다. 가족관계나 어린 시절 등은 자료 부족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조약의 무효화를 위해 의병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거의했다. 

단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김상한(金商翰) 의진에 가담하고 소모장(召募將)으로 임명됐다. 

그 후 청풍(靑風)·단양·충주(忠州)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에는 의병 수천 명을 영솔하는 의병 대장이 돼 군사 이진하(李晋夏), 중군장 김규철(金奎哲), 좌군장 민영팔(閔泳八), 우군장 이영승(李榮承), 서기 이치정(李致鼎) 등으로 의진을 정비했다.

기율을 엄정히 하고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했으며 격렬한 포고문을 국내·국외에 선포하고 각지로 다니면서 종횡무진하게 적과 접전해 크게 무찔렀다.

1909년 2월 이명상은 충주에서 의병장 이해수, 종사관 백낙천 등과 함께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헌병분견소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체포됐으나 탈주에 성공했다. 

탈주에 관한 자세한 내막은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다. 

또 체포되기 한 달 전에는 김상태, 조병륜, 원건상 등 10여 명과 함께 영춘군 동면에 거주하며 의병을 밀고한 자를 총살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김상한과 더불어 부하 60여 명을 영솔하고 청풍·담양·임실·나주·풍덕·중계·순천·보성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며 용맹을 떨쳤다. 

1909년 겨울 경상북도 영주(榮州)군 순흥(順興)면에서 적과 교전하던 중 적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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