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자 수필가

[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지인들의 정년퇴직 소식이 연달아 들려온다. 한 직장에서 30년 넘게, 혹은 40여 년 가까이 봉직했으니 청춘을 다 바쳤고, 인생의 3분의 2를 일하며 살았을 것이다. 올해 초, 자식이 물었다. “어머니, 언제까지 일하실 건가요?” “일 안 하면 뭐 하고 지내라고?”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일하고 산 세월이 어언 40년이다. 자식의 입장으로 보면 부모가 쉬길 바랄 때가 되기도 했다.

친정어머니께서도 생전 일을 놓지 않으셨다. 지병이 심해져 돌아가시기 전, 몇 해만 쉬셨지 내 기억 속 어머니는 늘 일하는 모습이다. 그분이 즐겨 하시던 말씀 중에 손을 놀릴 수만 있다면 놀려야 건강하고 죽으면 썩을 몸이니 아끼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자식들이 극구 말려도 일에 대한 의지는 초지일관이라서 자식들 마음이 더러 상하기도 했으나 돌아보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지켜보는 것이 진짜 효였다.

얼마 전 청주 노인복지관의 사회교육프로그램에 대한 등록 실태를 듣게 되었다. 프로그램 등록을 하려면 등록 첫날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고 모집 인원의 대 여섯 배나 되는 사람이 몰려서 여간해선 등록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이름난 유치원이나 학교의 입학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듯 어려운 사실은 익히 알지만, 노인의 복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마저 이런 실정이라니 우리나라의 인구 고령화 심각성도 발치까지 다가왔다.

고용률이 발표되었다. 10월을 기준으로 1989년부터 15세에서 64세까지의 고용을 측정했는데 올해는 가장 높은 고용률인 67.3%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다수의 언론은 반론을 제기했다. 주 노동 연령층인 30~40대의 일자리는 계속 감소하는데 국민 혈세로 노인 공공일자리만 늘려 고용률만 올리고 있으니 통계청의 발표가 부당하다는 거다.

고용률에 포함된 노인 일자리는 41만 명 이상이란다. 액수는 적지만 일을 해서 자신의 용돈은 물론 손주에게도 돈을 준다는 뿌듯함으로 산다면 국가나 젊은이가 책임져야 할 재정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자식의 입장으로 부모가 무료하지 않게 노후를 보내게 되어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 청년 실업은 비혼과 저출산을 양산하니 그것도 문제이다. 현재 이 두 가지 문제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예전 시대에는 없던 문제 같다. 성장하여 청년이 되면 결혼과 자녀출산이 당연할 줄 알았고 단칸방 살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모님 부양은 당연했고 형제자매 뒷바라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깨가 무거워도 가장의 의무를 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책임 회피는 남자의 자격 미달로 알아 부끄러워했다.

핵가족화에 이어 혼자의 시대이다. 그에 따라 모든 사람도 필수적으로 직업이 필요하게 되었고 일자리는 몇 배나 필요하나 일자리의 창출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 말도 틀리지 않고 저 말도 틀리지 않는다. 광화문과 여의도 집회의 말이 다르지 않으며 각자의 판단을 기준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은 민주 시민의 필수 조건이다. 다만 혼란과 분열로 양비론을 펼치거나 자신의 이익추구만을 위하는 권력집단에게 권리를 이용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가 따른다.

그간 민주공화국이라는 제도만 허울 좋게 마련했지 그에 따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은 불투명했다. 혹여 젊은이의 일자리 하나를 가로챈 것은 아닌가 했던 위축된 마음을 거둔다. 일에 대한 성취와 행복이 연결되고 심신이 건강하다면 나는 의무를 다하는 건강한 국민일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