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절 특집 / 김창도 선생 아들 인터뷰
3·1운동부터 독립운동 시작
만주 봉오동 전투에도 참가
독립군 산실 신흥무관학교서
지청천 장군 휘하 독립군 교관
김창도 지사 아들 김원진씨도

▲ 김창도 애국지사의 아들 김원진씨가 독립을 위해 활약했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김창도 지사.

[충청일보 김은영 기자] "아버지는 참 대쪽 같은 분이셨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절대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으셨지요. 애국지사 아버지를 둔 덕에 갖은 고생은 다 했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같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렇게 우리말, 우리글을 쓰며 편히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75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만난 애국지사 김창도 선생의 아들 김원진씨(84)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다.
1900년 평안남도 대보면 태평리에서 태어난 김창도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홍범도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신흥무관학교에서 지청천 장군의 지휘 아래 독립군 교관을 지냈다. 이후에도 독립군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계몽하고 광복 전까지 소련, 상해 등 곳곳에서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6·25 전쟁에 참가하는 등 군 생활을 하다 71살의 나이로 작고했다. 

김원진씨도 아버지가 정보요원으로 활동할 당시 그의 심부름을 하며 독립운동에 일조했다고 한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일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애국지사들은 자식들의 옷이나 신발 등에 지를 숨겨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아버지 덕에 항상 일제의 위협 속에서 지내며 가난과 싸워야 했다. 지병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 대신 어린 동생을 건사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광복 후 아버지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면서 9살 여동생을 데리고 중국에서 넘어왔지요. 어린 남매 둘이서 여기저기 밥을 얻어먹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3달 만에 세 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신문을 팔아 국수 한 그릇을 겨우 사 나눠먹고 구두를 닦아 돈을 벌며 힘들게 살았습니다."
김원진씨는 자신만이 이렇게 고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애국지사 자손들은 가난 속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애국지사들은 가산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썼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독립운동을 해야 했기에 가정에 신경을 쓸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광복후에도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어렵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독립을 위해 힘썼기에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나무 같은 사람'. 김원진씨가 본 아버지의 모습이다. 한 평생 군인으로 살며 조국에 일생을 바쳤기에 그에게는 꼿꼿하고 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김원진씨도 올곧은 아버지를 본받아 지역사회와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매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부한다.
흥사단 충북지부를 창설해 초대회장으로 활동했고 2012~2015년 광복회 충북지부 지부장을 역임하며 국가보훈처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주 3·1공원에 '항일독립운동 기념탑'도 세웠다. 친일파 민영은 재산환수에도 앞장 서는 등 지역 내 친일 청산에도 힘썼다. 이러한 공헌들로 지난 6월 24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김원진씨의 남은 소망은 단 하나. 충북에 애국지사들을 위한 위패보관소를 만드는 것.
"후손이 있는 애국지사들은 그 공이 늦게라도 빛을 발하고 있지만 후손이 없는 이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잊히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애국지사의 자손으로서, 광복회원으로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옆에 애국지사 기념관 겸 위패보관소를 만들어 선열들의 정신을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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