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며] 안용주 선문대 교수

조선 5백년을 지탱한 궁궐 가운데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완성된 곳이 창경궁(1483)이다. 조선왕조는 경복궁을 법궁(임금이 거처하는 공식적인 궁궐 가운데 으뜸이 되는 궁궐)으로 하고 창덕궁을 보조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로 운영해 왔다.

역대 임금들께서 정사를 보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즐겨한 탓에 왕실가족이 늘면서 창덕궁의 공간이 부족하여 성종이 창덕궁 옆에 창경궁(昌慶宮)을 마련하여 세조 비 정희왕후, 예정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왕실의 세 분 어른을 모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창경궁은 사무행정과는 거리가 먼 생활주거 공간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되어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정원(祕苑)을 비롯한 풍광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1910년 을사5적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마저 박탈당하면서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한 국가의 왕비를 낭인(浪人, 뜨내기 칼잽이)들을 동원해서 살해(殺害)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멸살(滅殺)시키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명칭을 바꿔 격(格) 떨어트리고 심지어는 동물원(動物園)을 만들어 조선왕조를 모리배들이 짓밟도록 하는 민족정신 말살을 획책했다.

일제는 창경궁을 동물원, 식물원을 포함한 테마파크로 만들었고 일본식 건물 수정(水亭)을 세우기도 했으며 돈 벌이에 눈 먼 자들에 의해 케이블카까지 설치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일본을 걷다 보면 많은 왕궁들이 있지만 일반인의 발길을 허락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수많은 성(城)들은 일본인들이 우러러보는 일왕(日王)(일본명 天皇)이 아니라 무력을 통해 일왕의 목숨을 좌지우지 했던 사무라이(侍,무사)의 우두머리인 쇼군(將軍)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칼이라는 무력을 통해 일왕을 지배했지만, 계급은 그 밑에 속하니 말하자면 일왕의 부하인 셈이다. 그런 쇼군들이 거처하던 곳은 모두 개방하여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을 수 있도록 했지만, 일왕과 관련된 시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식민지로 삼은 조선(대한제국)은 王으로서의 존엄함을 짓뭉개기 위해서 궁(宮)을 원(苑:동산 원)으로 바꿔 놀이공원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보란듯이 세웠던 조선총독부 건물 또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말살(抹殺)시키기 위한 일본의 잔혹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는 조선인의 기운을 멸실시키기 위해 임금이 살고 있던 경복궁 앞에 1927년 조선총독부를 세우면서 조선총독의 관저로 세웠던 건물로 알려져 있다. 즉, 경복궁을 앞으로는 조선총독부 건물로 막아 세우고 뒤로는 일본인 관리들이 묵는 숙소를 경복궁 뒤에 설치함으로서 조선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상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실가족이 거처하던 창경궁에 냄새나는 동물원을 만들어 한 나라의 왕조(王朝)를 능멸(凌蔑)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준비기간도 없이 급작스럽게 청와대를 시민공원으로 개방됐다. 그동안 풍수지리학적으로 좋다 나쁘다는 온갖 풍설이 난무하던 청와대에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공원으로 개방되었다는 점은 큰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불편해하는 국민들도 있는 것을 보면 조금 더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진 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개방한지 며칠도 되지 않아 이런저런 시설 파손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자신의 격(格)을 만드는 것은 결국 본인 자신이라는 점이다.

김구선생님이 말씀하신 문화강국의 '문화'를 만드는 것도, 부수는 것도 결국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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