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수의 대하 장편소설 '금강'
제 1부 3장 초승달 아래서
| ▲ <삽화=류상영> |
길이 가파른 경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박태수는 한 걸음 한 걸음 힘을 주어 걸으면서 둥구나무 앞에 있는 이병호의 논을 그려본다.
둥구나무 앞에 있는 논은 한 배미가 열 마지기나 된다. 논이 너무 커서 모를 심을 때는 하루 열 명의 놉을 얻어도 부족하다. 하지만 온 식구가 아침저녁으로 뒷간에 갈 필요 없이 오줌만 갈겨도 소출이 좋아질 것 같은 문전옥답이다.문제는 현재 도지로 붙이고 있는 땅만 해도 여기저기 있는 것을 합하면 모산에서 제일 많은 열 마지기나 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돌아 올 땅이 없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욕심이 나기도 한다. 자고로 땅 많아서 농사 못 짓는 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네 아부지는 시방 짓고 있는 땅만 해도 적잖으니께 강건너 불 귀경하는 듯 하시겄지. 시방 면장 어른이 손수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을매나 되지? 내가 알기루는 동네 앞에 있는 열 마지기 하고 닷 마지기짜리가 전부 인 거 같던데……"
갑자기 이병호에게 존칭을 쓰는 김춘섭도 가파른 고갯길이 힘들지가 않았다. 모산 사람들 중에서 혼자 살고 있는 오씨라든지 몇몇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부족한 몇 집을 제외하고 이병호에게 도조를 내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김춘섭도 샘골에 있는 논 세 마지기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샘골에 있는 물이 있는 진논이라서 가뭄걱정은 없는 대신 보리를 심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둥구나무거리에 있는 열 마지기는 문전옥답인데다 보리를 심을 수 있는 건답이다. 이병호의 환심을 사서 그 땅만 도지로 얻을 수 있다면 자식들 사친회비 때문에 아침마다 부모자식 간에 눈물 짜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잘 알고 있구먼. 밭떼기를 빼 놓고 논은 둥구나무 거리에 있는 열 마지기짜리하고 해룡네 집 뒤에 있는 닷 마지기가 전부여. 내가 생각해 볼 때도 이븐에는 진짜로 땅을 내 놓을 모냥여. 면장 님 근력이 항상 청춘은 아니잖여. 옛말이 쌀농사는 여든여덟 번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하잖여. 아무리 놉을 읃어서 짓는 농사라고 해도 쥔이 근력이 약하믄 농사에서 손 땔 수벢에 읎잖여."
박태수는 어두워서 고갯마루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걸어가면 고갯마루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길옆으로 보이는 집채만 한 바위며 해마다 참외농사를 짓는 참외밭의 원두막이나 한아름이나 되는 노솔 두 그루가 서 있는 지점 등이 이정표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갯마루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마다 백날이면 백날 생각나는 것이 이쯤에서 쉬고 싶다는 점이다. 하지만 지게질이 아니더라도 고갯길에서 쉬면 더 힘든 법이라서 무릎 관절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힘이 들어도 계속 올라 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봉께 면장 어른 환갑날 츰으로 둥구나무거리 논을 내 놓겠다는 말이 나온 거 같구먼."
"그려, 그해 칠월인가 휴전협정인가가 뭔가 됐잖여. 그래서 전쟁도 끝났응께 앞으로는 편히 사시겄다고 하믄서 그 말이 나왔을껴."
"삼시번 이라고 시 번이나 거짓말을 하시지는 않겄구먼. 어쪄? 자네도 둥구나무거리 논 부쳐 볼 생각이 있능겨?"
김춘섭은 이마에 맺힌 땀이 눈썹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팔짱을 낀 자세로 지게작대기를 들고 있던 손으로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하게 고갯마루가 보인다. 고갯마루에 올라가면 쉬는 지점이 있다. 생각 같아서는 지게를 내려놓고 쉬면서 초근초근하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