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에서 이어지는 유연함의 양면-탄성과 소성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졸업생 용현이가 어느 책 페이지 사진 몇 컷을 보내주었다. 글을 읽어보니 삶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부드럽고 유연한 성질에 다시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잘 안 알려져 있는 것 같다며 그 두 성질인 ‘탄성彈性’과 ‘소성塑性’을 소개하고 있었다. 공이나 스펀지처럼 외부의 자극을 받아 형태가 변화되었다가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성질이 탄성이라면 찰흙이나 금속처럼 외부의 힘에 한 번 형태가 변하면 다른 자극이 올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는 성질이 소성이다. 보통 부드러움이나 유연함이라 하면 탄성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탄성과 정반대되는 소성도 일종의 부드러움이라는 것이다. 탄성과 소성을 삶의 태도에 적용해보면 외부 자극이나 시련이 닥쳐올 때 그에 맞서 자아를 지켜내려는 태도는 탄성에, 자아를 비우고 매 상황에 맞춰 적응하는 태도는 소성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책 페이지들이 어느 책에 있는지 궁금해져 검색해 보니 ‘삶을 읽는 사고’(사토 다쿠 저, 이정환 옮김, 안그라픽스, 2018)라고 나왔다. 그날 곧장 책을 주문해 받아 읽어보았다. 흔히 우리는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혹은 어떤 삶의 시련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들어온 터라 외부의 자극이 오는 대로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그에 맞춰가려는 소성적 태도는 다소 무기력하고 줏대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인 저자 사토 다쿠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아와 개성을 지키려하는 저항뿐만 아니라 자아를 비움으로써 각 상황에 순응해나가는 것도 자아를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디자인의 세계에서도 누가 봐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자기만의 디자인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매번 달라지는 필요와 요청에 따라 디자인을 맞춰주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종종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왠지 자아가 없는 것 같고 고유한 개성이 사라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일정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고를 바꾸면 형태가 어떻게 변하건 자신은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자아라는 개념에 얽매이기 쉽지만 자아를 버려도 자신은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말을 음미해보니 굳이 내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주어도 여전이 자아는 훼손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은근한 위로를 받았다.
그런가하면 15년 동안 여러 분야 학문들이 함께 이어져 통합된 과목인 사고와 표현을 해오다보니 자연스레 한 영역을 깊이 파고들기보다 두루두루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왔다. 최근 지나온 연구를 돌아보자 내 사유가 어느 한 학문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수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읽게 되면서 시절 인연에 따라 마음에 와 닿는 작품이나 생각들을 연결해가는 나의 배움이 어쩌면 소성적 방식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주물 틀의 모양대로 변형되어도 금은 금이고, 용기 모양 따라 모양이 달라져도 물은 물이듯, 이 주제, 저 주제에 맞춰가며 생각이 부유(浮遊)해도 나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