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기편집인의 오늘 이 사람] 8-2 연만희 평화한약방 원장

“번 돈, 어려운 이웃에 나누는 건 당연한 세상이치죠”

2023-06-28     김명기 기자

연만희 원장이 평화한약방을 연 것은 1983년이었다.

올해로 40년 역사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늘 공부한다는 자세로 임했다.

한의학이란 것이 알면 알수록 더욱 미지의 영역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한의학 서적을 늘 가까이하고, 늘 생각하고, 늘 환자들을 대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그는 노력했다.

“한의학의 장점은 ‘자연식’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듯, 자연에서 나온 것이 가장 자연스런 것이요, 부작용이 덜한 법이지요. 약초 재료를 써서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힘은 모두 자연이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서로의 장점이 있는 법, 양방과 한방을 잘 결합시키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양방과 한방의 조합은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통해 하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 지향점은 생명이고요.”

 

스승과 같은 사형 성백효 선생

해동경사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성백효 선생은 그의 사형(師兄)이다.

서암 김희진 선생으로부터 같이 동문수학했지만, 그에게 성 선생은 늘 어려운 동문이었다. 그리고 서암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성 선생을 스승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성 선생은 간단한 의술을 펼쳐 보이면서 그가 한의학에 입문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늘 외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 선생이 호산(壺山) 박문호 선생(朴文鎬·1846~1918)의 책을 번역한 ‘논어집주상설(論語集註詳說)’를 발간하게 됐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찮았다.

사정을 알게 된 연 원장은 책 발간하는데 쓰라며 2000만원을 지원해 주었다.

호산 선생은 조선이 기울던 시절 충북 보은의 영해박씨(寧海朴氏) 문중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벼슬보다 후학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성리학 연구와 저술, 후학 양성에 매진했던 인물이었다. 고종 26년인 1899년 34세 때에 정통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 위해 충북 보은군 회북면 눌곡리 126-3번지에 서당인 풍림정사(楓林精舍)를 창건했다. 풀림정사 현판은 송시열(宋時烈)의 8대손으로 좌의정을 지낸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1818-1903)의 글씨를 판액한 것이다.

“한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책을 발간하는데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죠. 존경하는 사형이 역작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감격스러웠고요. 그리고 성 선생님의 업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것이 참 뿌듯했습니다.”

 

▲ 우암 송시열 묘소에서 아내와 함께.

 

아내의 권유로 수필집 발간

한 번도 그는 글을 쓰고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글도 조악한데다 책을 낼 만큼의 깜냥도 되지 않는다고, 그는 자신을 그렇게 판단했다.

수필집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말하지 않는다’를 발간하게 된 것은 아내의 권유였다.

환자와 오가는 남편의 말들을 지켜보면서 아내는 기록의 필요성을 느꼈던 듯싶었다.

한약방을 열면서 그는 환자들과의 대화를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꼼꼼하게 적은 그 기록들은 자신에게 또 다른 공부가 됐고, 환자들을 보다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됐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그 메모첩을 보며 그곳엔 환자가 나누는 대화 뿐만 아니라 세상과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았다.

40년 역사를 가졌으니 그만큼 많은 환자들을 겪었다.

잊지 못할 환자도 여럿 있었다. 그 중 수필집에 실은 한 사람의 이야기.

서울에 사는 의류디자이너인 임모씨는 강직성 척추염이었다. 온갖 처방을 써보았지만 도무지 나을 기미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병을 포기를 할 즈음이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어느 한약방으로 가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그의 사정을 듣곤 증평에 있는 평화한약방에 가보라고 권유했다. 그곳이 사람 잘 고치기로 소문난 곳이라며. 그 환자는 그 자리에서 방향을 선회해 서울서 증평으로 곧장 내려왔다.

긴병치레로 그의 돈은 거의 바닥이 나있는 상황이었다.

연 원장은 약을 지어주고 처방전을 써서 경동시장으로 가서 재료를 사서 달여 먹으라고 했다.

여기 오면 비싸니, 나한테 올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병원서도 안 된다고 해서 그는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의 병은 크게 호전돼 이젠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다.

 

‘나’를 잊지 않는 의원이 되고자

그의 마음은 품이 넓다. 어려운 환자가 찾아오면 밥 사주고 차비 주고 처방전까지 써서 보낸다. 전국적인 명성으로 문전성시, 평화한약방엔 늘 손님이 줄을 잇는다. 그 이유를 물었다.

“믿음입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환자들이 저에게 믿음을 주니 그 믿음에 언제나 보답하려 합니다. 좋은 약재로 처방하는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공부해야 하는 것이죠. 의서를 꽤 많이 봤습니다. 훌륭한 처방을 터득하는 데 선조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한약방을 찾는다. 그들이 연 원장을 믿기 때문이다

간혹 약을 썼는데도 낫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마음이 불편하다.

그는 ‘나’를 잊지 않는 의원이 되고 싶다고 한다.

 

‘공짜 손님’들의 선물들

어느 날 한 아주머니 환자가 감사의 표시로 들기름 한 말을 짜왔다.

그러곤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 선생님 한 번 안아주고 싶어요.”

영 낫지 않았던 고질병이 연 원장이 준 처방대로 했더니 말끔히 나았기 때문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한다.

“나 말고 서방님이나 안아 주세요.”

그렇게 그는 환자들과 거리가 없다. 역지사지, 그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늘 애쓴다.

그들은 별별 것들을 다 가져온다. 바리바리 싸 온 선물들은 환자들이 주는 보은의 마음이다.

고사리에 엄나무순에 두릅에 상추까지. 그 정성을 그는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공짜 손님’들이다.

궁색한 살림에 돈이 없어 병원 갈 여력조차 없는 이들을 그냥 내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여느 환자와 마찬가지의 정성으로 문진하고 처방한다.

 

▲ 폐교된 회룡초등학교를 사들여 2003년 11월 11일 건립한 ‘회인서당’. 그가 서당을 세운 건 스승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부지 매입에 4억원, 건물을 짓는 데 15억원이 들었다.

 

20억원 들여 회인서당 건립

 

연 원장은 2003년 11월 11일 ‘회인서당’을 설립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폐교된 회룡초등학교를 사들여 서당으로 세웠다.

부지 매입에 4억원, 건물을 짓는 데 15억원이 들었다. 기타 경비까지 하면 20억원이 훌쩍 웃돈다.

회인서당을 세우게 된 것은 스승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서암 김희진 선생이 작고하실 때 그에게 말씀하셨다.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1918년 광주에서 출생한 선생은 1999년 작고했다. 스승을 떠나 보낸 뒤 그는 스승님의 꿈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늘 잊지 않았다.

회인서당 학생은 20~30명 가량. 학생의 수준은 매우 달라 그에 맞는 교육을 하고 있다.

보통 4~5년 정도의 학습 기간을 갖는다.

제도권밖 학교라 할 수 있는데 큰 문제는 없다. 총명한 아이들이다 보니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고 중국 유학도 가고 국역연수원이나 민족문화추진회 등으로 진출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의대 학생들도 회인서당을 많이 찾아와 공부한다.

 

▲ 지난 3월 26일 증평 평화한약방에서 열린 23회 ‘도곡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올해로 장학금 누적액이 6억2700만원을 넘어섰다.

 

필생의 꿈, 도곡장학회 설립

도곡장학회는 2001년 설립했다. 장학회 설립은 그가 가진 필생의 꿈이었다.

돈을 벌었으니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야 하는 건 당연한 세상이치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보니 돈 없어 공부 못하는 설움을 알겠더군요. 그런 아이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환경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장학 혜택을 받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꾼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죠.”

여기에 추가로 한 가지 더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 그 아이들 또한 연 원장 자신처럼 자기의 재능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귀한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게 전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내가 번 돈이라도 내 돈이 아니라는 믿음을 그는 늘 가지고 있다.

서울에서 개업한 윤법렬 변호사는 매년 와서 도곡장학회를 위해 별도의 장학금을 내놓는다. 그도 연씨의 도움을 받아 공부를 했고, 그 고마움을 후배들을 위해 쓴다.

 

나누면 신기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증평군이 증평출장소였던 시기에 결식 아동을 위해 3000만원을 기탁했다. 모교인 증평공고에는 1000만원을 기탁했다. 결손 가족에도 지원금을 냈다. 한 가정당 10만원씩 두 가정에 지급했다. 여기저기 두루두루 내다보니 어수선했다.

그래서 체계적으로 기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됐다. 도곡장학회가 설립된 이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누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 좋은 마음 때문에 자꾸 그는 나누려고 한다.

처음엔 1년에 장학금 명목으로 적금을 따로 들었었다. 40년 간 지속되다 보니 자금이 어느 정도 쌓였다.

그 금액에 사재를 얹어 도곡장학회 기금을 만들었다.

10억원을 내어놓았는데, 현재 종자돈은 12억원 정도 된다. 그 이자로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있다. 1년에 1500만원 정도. 예전엔 2500만원 정도를 제공했는데, 이율이 떨어지다 보니 그나마 적어진 액수가 그 정도다. 2500만원이면 그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지난 3월 26일엔 증평 평화한약방에서 ‘도곡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을 개최했다.

도곡장학회는 올해까지 24년 동안 매년 장학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발굴·양성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는 도곡장학회 설립 정신을 바탕으로 매년 지급하고 있는 도곡장학회 장학금 누적액은 올해로 6억2700만원을 넘어섰다.

 

▲ 2003년 한국 서예협회에서 주관한 충청북도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충청북도 서예대전서 대상 수상도

그 살림을 도맡아 해준 이가 현직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건일 선생이었다.

그 인연이 자식들에게 까지 이어져 이젠 사돈지간이 됐다.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로 참 많이 붙어 다녔다.

지음(知音)이랄까, 서로는 서로의 뜻과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처음 만난 곳은 서예인들간의 교류에서였다.

서예에 대해 일가를 이뤘던 그는, 그럼에도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서예교실을 통해 서도인의 뜻을 규합하고자 했다.

그가 서예에 입문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학을 공부하면서였다.

2003년엔 한국 서예협회에서 주관한 충청북도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역 사회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2012년 12월 24일엔 충청북도 지역사회부문 도민대상을 수상했다.

 

정(正) 하나만 가지고 성실하게 살고자

“어느 날 선생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어떡하면 잘 사는 것인가요?’ 선생님이 대답하시더군요. ‘정(正) 하나만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라.’ 그게 제 삶의 철학이 됐습니다.

그는 무자기(無自欺)를 실천하려 늘 애쓴다.

무자기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고 거짓된 언행을 하지 않는 것,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양심(良心)을 간직하고 도리에 맞는 언행을 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처음 가출했을 때,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도통 답이 보이지 않았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고 미웠던 때가 그때였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를 공부하게 만들었다. 잘난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을 스스로 알게 된 것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아내 잘 만난 덕에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키면 아내에게 늘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한다.

둘째 아들이 한의대 가서 아버지 뒤를 이으니 그 또한 참 대견하다.

그는 처방전을 늘 붓으로 쓴다. 붓을 들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필체를 통해 깨끗이 낫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처방전엔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