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그 언저리

2024-01-28     김명기 기자

동네 친구 규동이의 마지막 모습을 본 건 4년 전 총선이 한창 치러지고 있던 때였다.

그때 동네 친구 다섯이 모여 제천 의림지 옆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폐암이 재발된 규동이는 치료를 거부하고 있던 터였다.

이러나 저러나 가는 건 순서 차이일 뿐인데,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먼저 가서 기다릴게.”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살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덧붙여 동창들이 십시일반 모은 700만원 정도를 건넸다.

한사코 거절하던 규동이는 결국 그 돈을 받고는 울었다.

그날, 제천서 청주로 오는 길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자꾸 주책없이 눈물이 났다. 시야가 흐려져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친구의 아들로부터 아버님이 소천했다는 소식을 받게 됐다.

참 잘생긴 친구, 허세는 좀 있었지만 마음 속이 맑았던 친구였다.

 

비움을 보여줬던 송일상 작가

사행1965년 뱀띠들의 모임이다. 예술이 외면받는 시대에서 동인 5명의 친목은 30년 가량 변함없이 유지됐다. 멤버들의 면면을 보면 연규상 소설가, 김사환 화백, 송일상 조각가, 류정환 시인, 그리고 필자다. 이제 4명 밖에 남지 않았다.

사행동인 송일상 조각가가 지난해 1228일 별세했다. 우리 나이 예순살을 목전에 두고, 뭐가 그리 급했는지. 장례식장을 도착하니 송 작가의 아내 임은수 작가가 말했다.

예순이 되는 내년엔 제가 우리 사행 동인들을 위해 소소한 잔치 한 번 벌이려 했는데.”

송 작가는 문의 마동 창작마을에서 늘 돌을 팠다. 땡볕이 내리쬐는 염천에서도, 함박눈 흩날리는 북풍한설에서도 그는 늘 돌을 파냈다. 파내고 파낸 돌의 내면은 공간이 됐다. 그 공간을 통해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비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이 개인의 삶이든, 역사의 쳇바퀴이든.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좋은 신문갈망했던 이정규 국장

친구 같은 후배 이정규 국장이 지난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가 충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을 때, 그와 나는 소줏잔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는 좋은 신문을 이야기 했고, 나는 시대 정신으로 화답하곤 했다.

그 많았던 이야기들은 속절없이 허공을 맴돌고, 그와 마주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선술집은 그대로인 데, 그는 이제 없다.

가까운 사람들이 속절없이 떠나니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기사 나도 가고, 너도 가고, 우리 모두 갈 터이지만,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떠난 이들의 빈자리를 생각하면 쓸쓸한 겨울 바다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떠나간 이들을 안타까워하는 건 그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던 일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잔상이 서사가 되고, 서정이 되고, 우리 삶의 과거를 켜켜이 쌓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말이 남아있고, 그들과의 교감이 남아있고, 그들과 함께 했던 지향점이 남아있는데, 그들은 떠났다. 그 부재가, 그 참을 수 없는 고독감이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김상용의 시가 생각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밭이 한참갈이 / 괭이로 파고 / 호미론 풀을 매지요. //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 //

왜 사냐건 / 웃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