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초파일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어머니가 아흔을 넘기신 지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시니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하고 외부 나들이도 싫어하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님께 부처님 오신 날은 년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초파일이 오면 평소 다니시던 절에 가서 스님을 뵙고 연등을 달며 자식들의 복을 빌곤 했었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나간 날들을 얘기하며 즐겁게 보내는 하루이니 어머니에게는 명절과 다름없었다.
지금도 어머니가 계속 살고 계시는 내 고향 음성에는 가섭산(迦葉山)이 있다. 이름부터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하나인 가섭의 이름에서 따온 듯하니 불교적 색채가 짙은 산이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가섭사라는 절을 포함해 산기슭까지 몇 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어머니는 이 중의 한 절을 수십 년을 다니시며 자식들의 무탈과 행운을 빌었다.
초파일을 즈음하여 외부 출입을 부담스러워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랜만에 가섭사에 다녀왔다. 다행스럽게도 찻길이 잘돼있어 수월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추억이 어린 장소를 다녀와서인지 어머니는 옛날이야기를 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힘들었던 일들을 회상하기도 하신다. 내 어린 시절의 소풍지였던 산기슭에 관한 사연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전 어머니가 땔감을 위해 나무를 해 이고 내렸던 골짜기에 대한 회상도 하셨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바래면 힘들고 아팠던 기억도 추억이 되고 그리워진다. 세상사는 요령에 능숙하지 못하고 고지식하며 가진 것도 변변찮은 아버지를 만난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거의 가장과 다름없는 힘든 시절을 보내셨다. 아마도 힘든 세월을 보내며 어딘가에 의지하고 마음을 의탁할 곳으로는 부처님의 품만 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하듯 육체의 배고픔을 채워놓는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마음을 내려놓고 위안받을 곳이 있어야 삶은 덜 삭막하고 견디기 쉬운 법이다.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중에 대부분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처음 절을 다니며 부처님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이나 어머니는 여전 불법의 오묘한 섭리나 석가의 가르침에는 무지하시다.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등의 불법을 이해하기는커녕 읽기도 어려워하신다. 그래도 어머니의 부처님에 대한 애정과 섬김의 정성은 누구 못지않고 부처님이 어머니의 삶을 굳건히 지켜주고 보살피실 것이라는 믿음에 의심이 없으시다. 어머니의 부처님 사랑은 아이돌을 열정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팬클럽 멤버의 조건 없고 의심 없는 애정과 다를 바 없다.
어머니에게 종교는 연예인에 대한 덕질처럼 맹목적이고 순수하다. 내용과 진실에는 관심 없이 함께하는 믿음의 동반자들과 교류하며 믿고 따른다. 그렇게 하는 게 삶도 풍요롭게 하고 마음의 평화도 가져오니 의지하고 따르신다. 대다수의 소박한 신도들에게 기도는 신의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기도하는 본인의 마음을 바꿔준다. 신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지만 사실은 신도들이 신을 지키기도 한다. 어머니가 수십 년을 다니시던 절의 스님은 몇 해 전 열반에 드시고 스님의 아들이 이제 그 절의 주지 스님이 됐다고 한다. 시간은 그렇게 초파일의 주객 모두를 세대교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