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술에 관한 기억 2.

2024-08-11     김명기 기자

불러낸 친구들과 뒷동산 너머 으슥한 소롱골로 갔다. 칡넝쿨 우거지고 잡초만 무성한 소롱골은 웬만해선 어른들이 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4홉들이 소줏병을 들고 녀석들에게 물어봤다.

너희들 술 먹어 봤니?”

얌마, 그건 초등학교 2학년이면 떼는 거여.”

녀석들은 논으로 들로 나가 일을 하는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하며 몇 모금씩 먹어본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술을 마셔보지 못했던 것.

술 마셔보니 어떤데?”

그거, 기분 끝내준다.”

 

이게 꿈이니, 생시니?”

녀석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도 두어 잔에 좋은 기분이 솔솔 올라오던 차였는데, 더 좋아지는 기분이란 게 어떤 것일까 기대됐다.

그렇게 동네 꼬마 네 녀석들이 외진 소롱골에서 소주 4홉을 모두 마셨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는 거였다. 후폭풍은 잊은 지 오래.

그런데 웬걸,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거다. 움푹 들어간 땅인가 싶으면 튀어나온 땅이고, 튀어나온 땅인가 싶으면 움푹 들어간 땅이다. 내 몸과 정신은 온전한데 땅이 제 정신이 아닌 게다.

이미 음주에 이골이 난 녀석들은 끄덕없는데, 나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께서 바라볼, 술 취한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놈이 어떨까 싶었다.

이게 꿈이니, 생시니.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다. 세수 좀 해야겠다.”

설 앞이라 수도는 꽝꽝 얼어있었다. 아이들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 수도를 녹인 뒤 그 찬물을 내 몸에 쏟아 부었다. 차가운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 까무룩 의식을 잃어갔다.

 

술 못 먹는 놈은 족보에서 빼버릴 겨

의식의 저 편에서 뭔가 따끔따끔한 게 느껴졌다. 서서히 눈을 떠 보니 내 손톱 위쪽을 바늘로 열심히 찔러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왜 집에 누워있는 거지.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초등학생으로 해선 안 될, 내 죄과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났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녀, 괜찮어, 괜찮어. 넌 괜찮어?”

평소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그런 관대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얼음물 세례를 받은 내가 기절을 하자 친구 녀석들은 내 머리와 다리 한 짝씩을 들고 뒷동산 너머로 우회해 우리 집에 나를 던져놓고 도망쳤던 것이었다.

토사곽란이 찾아와 의식을 잃었던 것인데, 침술을 알고 있던 아버지께선 피를 돌게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죽어라, 아니 막내 아들놈 살리려고, 싸늘해진 내 몸에 바늘을 콱콱 찍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죽다 살아난 아들 놈에게, 평소 우스갯소리라곤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아버지께서 말했다.

괜찮어, 괜찮어. 살았으면 됐다. 우리 경주김씨 계림군파 판윤공 자손 집안에서 술 못 먹는 놈은 아예 내가 족보에서 빼버릴 겨.”

대학교에 입학한 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자격이 주어졌을 때 아버지께선 캡틴큐 두 병을 사오라 하셨다. 그러면서 묵묵히 술을 따르며 잔을 건네셨다. 어릴 때 전과도 있고 해서 정신줄 붙잡고 마셨다. 부자가 두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말씀하셨다.

술은 어려운 사람한테 배워야 실수가 없는 법이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동네친구들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