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수 없는 이름들
[월요일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해마다 한 해를 보내는 12월 끝자락 즈음에는 의식처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새로운 다이어리를 준비하고 한해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지난 다이어리 정리를 한다. 좋았던 일 궂은일들을 다 삭제를 해버리고 완전 리셋을 한다. 마음가짐을 초기화시키고 새롭게 여백을 채워가야 한다. 그렇게 신년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다시 시작을 한다. 그러나 완전히 지울 수 없는 페이지들이 있다. 마음속에 지우개로만 지우고 다시 또 봄이 오고 있다. 겨울 내내 꽁꽁 얼었던 동토의 대지가 봄의 생명력으로 꿈틀대듯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리움들이 꿈틀거린다.
다이어리 연락처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연락처 명부에서 지워내야 할 이름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젊어서는 폭넓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사는 것이 행복하고 풍요로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폭넓은 관계보다는 인맥이 좁아도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다. 그렇게 소통하고 사는 것이 소소하지만 온전한 행복으로 다가왔다. 한사람, 한사람 이름을 삭제하고 연락처를 지울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공유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지나간 것들은 다 아름답다. 그 순간들은 대부분 반짝반짝 빛나던 내 젊은 날의 시간들이였기에 더욱 소중하게 기억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해 봄 시인이신 김 교장 선생님과 수필을 쓰시는 사모님 내외분을 모시고 청남대 옆길로 옥천 가는 길을 달렸다 산속으로 굽이굽이 낸 길이라 산벚꽃이 봄눈이 내린 듯이 산이 온통 하얗다. 골골이 대청호 호수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소년 소녀가 되어서 환호를 했었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이 우리의 꽃구경을 환영해주듯이 꽃잎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 꽃길의 끝에서 점심으로 왕소금을 술술 뿌려가면서 맛있는 고기를 구워 먹었었다.
그해 봄 꽃구경을 마지막으로 다음 해 봄에 또 오자던 악속을 지키지 못하고 천국으로 떠나셨다. 선생님의 다정한 모습이 생각나면 선생님의 유작시집 ‘시인의 집에서 차 한 잔’ 꺼내서 다시금 읽어본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김 선생님의 성함과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이십여 년 전에 함께 글 공부를 하던 글 도반 선생님들이 계셨다. 낮에 만나서 공부를 마치면 그 열정과 열의가 식지가 않아서 밤에도 자주 만나 몇몇이 문학 스터디를 했었다. 여수가 고향인 주인 여자가 하는 야식집 안방이 우리들의 아지트였었다. 김치찌개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키면 덤으로 주는 안주가 더 푸짐했었다. 일곡 선생님과 때로는 교수님도 모시고 너댓명이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수시로 우리들만의 문학의 밤을 열었었다.
서로의 작품을 낭송하면 합평 시간은 냉철했다. 글이 좋다고 칭찬을 들으면 좋아서 한잔 마시고 혹독한 비평을 들으면 속상해서도 한잔 마시고 결국은 모두 거나하게 취해서야 우리들의 문학의 밤은 끝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의 글도 익어가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우리들의 대장이시던 존경하는 일곡 선생님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서둘러서 가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글을 쓰시고 책을 많이 남기셨는가보다.
나의 다이어리에도 핸드폰 연락처에도 일곡 선생님의 전화번호는 그대로 저장이 되어있다. 지울수가 없고 지워지지가 않는다. 돌아 가신지 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나의 친정아버지가 목에 걸고 다니시던 핸드폰 전화번호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삭제해버리면 영원히 잊혀질 것 같아서 지울 수가 없다. 아무리 그리워도 이승을 떠나 유명을 달리하면 연락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숙명 같은 인연도 있지만, 지척에 두고도 연락을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운명적인 인연들도 있다.
좋은 관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소원해지기도 하고 뜨겁게 사랑하다가 문득 먼 그대가 되기도 한다. 한 우주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얼굴 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 누구든 사랑과 화해와 용서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