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

2025-04-16     충청일보

[박별칼럼]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새봄의 길잡이 목련꽃도 하마지고 작은 울타리마다 노오란 개나리가 봄인사를 잊지 않는다. 어느 시인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드는 4월을 안고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탄다고 했다.

서귀포 모슬포항에서 타오르는 벚꽃 나무를 뒤로하고 우리도 배를 탔다. ‘왜 최남단 마라도까지 가지 않고 가파도에서 내려야하나’ 속으로 아쉬움이 솟았지만 섬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맺힌 마음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은연중 순결한 바닷바람이 섬 속의 섬에 잘 오셨다고 연인처럼 품을 열어 주었다.

가파도는 둘레가 4km 남짓한 아담한 섬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푸른 초원 같았다. 최고봉도 약 20m로 구릉이 거의 없이 평탄하여 졸아든 가슴이 확 열리는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자전거도로와 올레길이 나 있다니 친구들 마음에도 한결 여유가 깃든다.

우리가 찾은 4월 초는 마침 청보리 축제를 앞두고 있어 섬 주민들 움직임이 나름 분주해 보였다. 가파도의 청보리는 국토 최남단의 땅끝에서 가장 먼저 전해오는 봄소식을 안겨주는 전령사로, 5월 중순까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육지에서도 초봄의 보리밭을 마냥 좋아하던 나는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섬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렇게 익는 보리보다 청보리는 풋보리라 하여 마치 앳된 소녀를 보는 듯하다.

자전거로 트레일을 달리는 친구도 있고 대부분 올레길을 따라 걷기로 한다.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 그리고 가까운 송악산이 와 주어서 고맙다고 미소를 보낸다.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 초록의 물결은 마음 깊이 잠들었던 소녀의 마음을 꺼내 혜윰에 날개를 달아준다.

여고 시절 제주도 수학여행! 급우들과 다닥다닥 열매처럼 함께 올랐던 용두암은 추억 속에 아련한데 50년 만에 신중년이 되어 다시 만났다. 어찌 변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인데 동기들은 다시 그 시절 웃음도 걸음걸이도 그대로인 것 같다. 충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인생길은 저마다 달라 서울, 부산, 대구, 경주, 청주 등 전국에서 독립선언서 민족대표처럼 33명이 모여 제주를 다시 찾은 것이다. 처음 가보는 휴애리, 비자림, 사려니 숲길도 좋았지만 가파도 올레길을 함께 야호하며 걸은 그날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섬은 어쩌면 바다의 꽃이다. 또한, 그 바다로 인해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올레길을 따라 해안가를 걷다 보니 지난 1월 호주에서 본 남태평양 바다가 다시 떠오른다. 끝없이 푸르고 아득한 울렁임 아름다움 그 이상의 고요! 나는 순간 무인도에 들어선 황홀함에 젖었다. 하염없이 갈매기를 날리고 바다와 하늘 속에 재잘대는 친구들과 조금 떨어져 맨 뒤에서 먼먼 바다와 떠 있는 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모든 걸 잊는 적막의 순간에 놓일 수 있음은 어쩌면 여행의 귀한 선물일 것이다. 길옆 비탈 바위틈에 뿌리내려 온갖 비바람을 이겨내고 자줏빛 열매를 매단 선인장이 얼마나 외로울까 가까이 지켜봐 주었다.

여고 시절을 지나 반세기 동안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생업을 하며 달려온 동기들의 얼굴이 손바닥선인장 백년초처럼 대견스러웠다. 50여 년간 깊고 푸른, 때론 거친 바다를 건너온 지금, 올레길에 핀 한 송이 한 송이 꽃이다. 가파도를 초록으로 수놓으며 바닷바람과 춤추는 청보리의 짙은 향내가 동기들의 가슴에 깃들기를! 거룩한 생의 한가운데 마련한 기념 여행에 오지 못한 몇몇 동기들의 얼굴도 스쳐 지나간다. 모두 하늘 아래 열심히 살고 있겠지...... 사월!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을 사랑한다. 이제 이 나라 이 시대 소중한 사람들 곁에서 눈물 없는 무지개 계절이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