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빈집
[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날짜가 도래하지 않았거나 긁지 않은 복권이 주는 막연한 기대감처럼, 기간이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어떤 일에 대해 인간은 긍정적 기대를 한다. 또한 불행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남의 일로 여긴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고 죽음을 향해가는 길 도중에 겪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렇다. 언젠가는 분명하게 다가올 일임에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삶은 대부분 예상대로 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길이 바뀌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시간에 갑작스럽게 길을 달리해야 할 일도 생긴다. 어머니의 삶도 그랬다. 이제 100세를 몇 년 앞둔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가 늘 말해왔던 삶의 날보다는 꽤 더 길게 이어진 상태였고, 그렇게 위태롭게 진행되던 노년의 일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복병에 급작스럽게 삶의 방향을 틀었다. 막연한 예측은 있었으나 그날이 이렇게 닥친 것은 뜻밖이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날이 이렇게 현실이 된 것도 갑작스럽다.
요양원으로 떠나신 어머니가 살던 집을 찾았다. 한 달여 만에 찾은 빈집은 점점 사라져가는 사람의 흔적과 온기가 빠져 썰렁하고 쓸쓸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한 줌 볕에 의지해 겨우 연명하고 있는 주인 잃은 화분과 힘겨운 노년의 삶을 도와주었던 몇몇 물건들과 낡은 가재도구들이, 야반도주하느라 정리 못 하고 떠난 빚쟁이의 살림살이처럼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다.
어머니는 이 집에서 아버지와 15년 정도를 사셨고 그 후 25년 정도를 혼자 계시며 노년을 맞았다. 오래전 부모님이 살던 과수원 오두막집은 36번 국도가 읍 외곽으로 우회도로를 내면서 수용되었고 그 후 이 조그만 연립주택으로 이사했었다. 중년과 노년의 반평생 세월을 보냈으니 구석구석 어머니의 손때 묻지 않은 곳이 없다. TV장 아래에 접혀있는 공과금 용지 몇 장, 그 옆에 때 묻은 머리빗에 끼어있는 흰 머리카락 몇 올, 늘 하루 운세를 가늠해 보던 모퉁이가 닳아 만질만질한 화투장,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아직 거기에 있다.
서랍 속의 봉투에서 지금은 장성한 어린 손주들과 찍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 몇 장이 나왔다. 사진 속의 어머니는 지금의 나보다 10년은 젊은 나이다. 그때는 수십 년 후의 오늘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나, 과거의 어떤 시간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어떤 것은 우그러지고 망가진 채로 그리고 어떤 것은 잊혀 숨겨진 채로 과거의 표정과 분위기까지 간직하고 그곳에 있다.
인지과학에 의하면 사람은 익숙해진 공간에서 자신의 능력과 기억이 더 잘 발휘된다고 한다. 이제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나머지 삶을 맞아야만 하는 어머니는 잘 지낼 수 있을지 안쓰럽다. 우리의 삶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어도 나로서 나를 자각할 수 있는 상태라면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욕망은 그것대로 옳은 일일까.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거두지 않음이 보리에게 저주이듯이, 죽지 않음이 인간에게 저주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즈음의 어머니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는 초월해 보이신다. 육체와 정신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삶을 불편해하시며 적당한 때에 떠나지 못했고 자신의 삶을 자기 의지로 결정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만 하셨다. 언젠가 시간이 됐을 때 나도 그렇게 담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