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날 것’의 의식 재조명 : 뒤뷔페의 ‘우를루프’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최근 언어, 회화, 영상, 음악 등 다양한 영역의 생성형 AI가 그동안 인간의 고유한 자질로 여겨졌던 창작까지 실현해내게 되면서, 인간 같은 인공지능, 인간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에 대한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AI가 문학, 음악, 미술, 영화 등을 창작하기는 하지만, AI의 창작 방식이 인간의 창작 방식과는 다르며, AI가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서 언어나 음악, 그림, 영화 등으로 표현하는 ‘이행’ 자체는 아직 실현해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의식과 표현 ‘사이’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AI가 인간의 삶 가장 깊숙이 들어오면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해진 오늘날 인간 고유한 자질을 들여다보는 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예술에서도 인간 의식의 발로의 지점, 인간 의식 경계에 가닿고자 시도한 다양한 예들이 있는데,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의 예술도 그 한 예이다. 뒤뷔페는 정신병자나 어린아이처럼 사회적 규범의 교육의 틀에 갇히지 않고 날것의 감성을 고스란히 뿜어내는 이들의 창작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여 ‘아르 브뤼Art Brut’로 명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서도 통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의식 표현을 추구하며 질료와 방법을 추구해나가다 1962년 7월 프랑스 북부 투케에 지은 작은 빌라에 체류하던 중 전화 통화를 하면서 무심코 볼펜으로 그린 낙서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아르 브뤼를 창안한다.
그가 그린 낙서는 비정형의 세포조직 같은 생명체의 성장과 증식처럼 연속된 덩어리의 모양인데, 그는 거기서 으르렁거리며 울부짖는 위협적인 어떤 소리를 연상하게 되어 그러한 느낌을 주는 음성적인 신조어 ‘우를루프’라고 명명하고 1974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들 연작을 창작한다. ‘우를루프’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의식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인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환상과 몽환의 인간 내면에서 길어낸 느낌을 준다.
퐁피두센터에 소장된 ‘기억의 사슬 III(Chaîne de mémoire III)’(1964)도 우를루프 중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인간 의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움직임의 인상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 안에는 걸어 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몇몇 검은 굵은 윤곽선이 강조되어 있는데, 마치 기억 속에 유동적이고 잠재적으로 연상되어 떠오르는 자아 혹은 타인에 대한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는 검은색, 흰색, 빨간색, 파란색 등 제한된 색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흡사 세포들의 연속체 같은 비정형의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간격의 선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전체가 채색되어 있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조형 이미지로 독특한 표면적 질감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뒤뷔페의 우를루프처럼 인간 의식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날 것의 순전한 직관적 감성의 발현에 천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인간 의식과 표현 사이의 이행 혹은 연결에 대한 미학적 탐험으로 AI시대 인간의 고유한 자질을 이해하는 데 한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