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는
[충청논단] 박재명 수필가
오월 장미꽃잎이 땅에 떨어져 흩어진다. 유월의 호국 영령들이 흘렸던 선혈처럼 거리에 흩어질 것이다. ‘4월의 꽃’ 벚나무가 출산한 버찌들도 나무 아래로 우루루 떨어져 이소를 시작할 것이다. 생명을 품은 수많은 열매들은 제각각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다.
화려한 봄날의 꽃잔치 무대는 서서히 닫히고 있다. 앵콜 무대처럼 나온 것은 작약꽃과 접시꽃, 밤꽃이 눈에 띌 뿐 차분한 분위기다. 그 가운데 사람들 손길이 닿지 않은 공터나 묵은 밭에 망초꽃이 수북이 모여 핀다. 먼지 없는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맑아진 시야는 여섯 배나 늘었다. 화려했던 봄날의 흥분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앉혀주는 달이다.
유월은 망종으로 시작해서 하지로 넘어간다. 유월이 되면 벌써 세월이 어느새 이만큼 흘렀는지 깨닫게 된다. 앵두가 빨갛게 익고 누렇게 익은 보리를 수확한다. 논에 물이 들어 모내기를 시작한다는 절기다. 논마다 산 그림자를 담고 고즈넉한 들녘을 만들어낸다. 논물 만난 개구리들은 밤마다 합창한다. 보리 베고 모내기할 때면 아궁이를 지키는 부지깽이도 일을 거든다고 할 만큼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매우 바쁠 때다. 그러나 요즘은 기후변화로 날씨는 더 더워지고, 기계화 농업으로 모내기는 벌써 끝이 났다. 기후변화로 농사 달력을 위기의 변방으로 내몰린다.
유월은 누구의 계절인가? 해 뜨고 지길 수십 년, 달이 차고 기울길 수십 년. 그 세월도 말이 없고 피 흘린 고지도 말이 없다. 오로지 정적만 흐를 뿐이다.
특히 유월은 더 그렇다. 피로 흥건히 젖었던 강토의 유월. 그곳 뙤약볕 아래 피고 지는 나무와 풀과 야생화들은 그때를 기억할까? 그 시절을 겪었거나 겪지 않은 사람도 유월이 되면 자못 숙연해진다.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유월이 되면 습관처럼 말이 없다. 무명고지에서 죽어간 국군이나 학도병의 넋이 드리우는 듯,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에 피고 지는 풀잎도 고개를 숙인다. 녹슬은 철길에 싹 틔운 잡초도 그때 정황을 알고 있으리라 본다. 석양에 거꾸로 꽂힌 총대 위의 철모를...
그를 두고 눈물로 떠나야 했던 전우의 애끓는 피의 DNA가 그때 피운 이름 모를 잡초의 몸에 유유히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유월은 언제쯤에나 5월처럼 7월처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기억들은 영원히 잠재울지 모르는 일이다. 이름 모를 묘지에 하얗게 망초는 하얗게 피고 낮에는 뻐꾸기 하얗게 울고, 밤마다 소쩍새가 또 그렇게 서럽도록 운다.
오월과 칠월의 사이에 유월은 조용한 안식을 취한다. 칠월이면 장마지고 팔월이면 또 열정적으로 대지를 더 달굴 것이다. 유월이 있기에 피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잠시 하던 일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유월! 그 열정으로 가을을 맞고 봄을 준비하는 겨울의 윤회를 돌리는 발전기는 돌아간다.
숙연한 가운데 더 이상 슬퍼하고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과 북의 대립, 동과 서의 대립, 좌와 우도 서로 손잡고 잘못은 털어버리자고 손짓했으면 좋겠다. 싸우는 이유는 하나가 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이념과 소신을 뛰어넘는 더 고귀한 이데올로기도 있을 것이다. 하나된 민족을 이끄는 단군도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월의 주인공인 호국 영령들도 화합과 평화를 위해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유월의 산하는 더욱 푸르러질 것이고, 튼실한 열매를 생산하여 우리의 강토를 기름지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