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가 필요한 선거판
[교육의 눈] 김재국 문학평론가‧에코 색소폰 대표
양치기 소년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늑대다!” 하고 외치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고 달려온다. 그러나 거짓 외침이 반복되자 사람들은 점점 반응하지 않고, 결국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를 넘어선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비롯되며,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늑대소년의 마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거철만 되면 다짐과 공약이 쏟아지고, 약속은 피로할 정도로 넘쳐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실망과 냉소뿐이다.
특히 교육 공약은 매번 반복된다. 사교육 해소, 입시 공정성, 돌봄 확대, 교실 혁신 등은 선거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 지켜진 사례는 드물다. 선거가 끝나면 교육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에게 전가된다.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는 교육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하고, 교실 현장은 교사 한 사람의 헌신에 의존하고 있다. 사교육 시장은 커져만 가고 공교육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부모는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린다.
교육 정책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신뢰는 흔들리지 않는 이행 의지에서 생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말뿐인 정책을 들어왔고, 그 결과 늑대소년의 마을 사람들처럼 교육 공약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판에 등장한 교육 정책만큼은 허황된 구호가 아닌 실천 가능한 약속이기를 기대해 본다.
외교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미중 갈등, 북핵 문제, 기후 위기, 경제 안보 등은 모두 진정한 외교력 없이는 풀 수 없는 난제다. 외교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영역이다.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외교 전략이 흔들리면 국제사회는 차갑게 돌아선다. 한 국가의 외교 원칙과 일관성이 상대국에 신뢰를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신뢰는 군사력보다 강하고 자원보다 오래간다”라는 말이 나온다.
무역도, 동맹도, 평화도 결국은 ‘상대국이 우리의 말을 얼마나 믿는가’에 달려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외교 리더십은 결국 늑대소년처럼 누구도 믿지 않게 만든다. 한 번 잃은 외교적 신뢰는 수년이 지나도 회복하기 어렵다.
통일 역시 선거철 단골 메뉴다. 그렇지만 평화와 통일 문제는 정권의 홍보 수단이나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로 인해 통일문제는 국민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 간다. 한반도의 통일은 정치적 구호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적 합의, 장기적 전략, 진정성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 지도자의 한 마디보다 작은 실천 하나가 더 큰 울림을 주며 말보다 일관된 행동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인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국민이 외면한다면 그때는 통일이라는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선거판의 완벽한 공약이 아니다. 책임감 있고 진정성 있는 약속,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구체적 계획이다.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은 선거판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일관되게 신뢰를 쌓아가는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