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 둑방길

2025-06-10     충청일보

[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저수지로 향하는 물길은 일 년 내내 맑게 흐르고 있다. 곳곳에 풀들이 자라서 시냇물은 이리저리 길을 따라 구불구불 흘렀다. 모래가 물에 씻겨 맑게 보였다. 발이라도 담가보고 싶었다. 때로 비닐 조각이 풀에 걸려있는 것을 볼 때는 들어가서 그것을 벗겨주고 싶다.

이른 봄에는 미나리가 냇물 가장자리에 빼곡히 자라서, 동네 아낙들이나 인근 주민들이 장화를 신고 들어가 한나절씩 돌미나리를 캐고는 했다. 그것들이 자라서 넘실대고, 다른 풀들도 물이 없는 모래 위에 수북해지면 맑은 물 사이 수풀이 어여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걷어내어 은빛 모래 드러나는 도랑을 만들고 싶어진다. 늘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길이라 마음뿐이고, 시골에 살면서도 한가하게 도랑을 치울 여유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것을 깨끗하게 예쁘게 치워보고 싶은 마음만으로 일 년을 넘겼다.

작년 여름 홍수 때 엄청남 물이 삽시간에 그 위를 넘실대며 흘렀다. 마정리 너른 과수원과 얕은 구릉에 내렸던 빗물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상시에도 늘 졸졸 흐르던 도랑인데 큰비가 오니 양쪽 돌 축대를 밀어내기라도 하듯이 거세게 물이 꽉 차서 흘렀다. 장마 끝에 도랑을 거슬러 물이 흐르는 찾아 올라갔었다. 논밭, 과수원 여기저기서 도랑을 향해 물고 가 나 있었다. 몇 개의 도랑이 합쳐져서 큰 수로를 만들었고 우리집을 지날 때는 제법 깊은 도랑이 되어 온 동네 물을 다 받아 저수지로 나르는 것이었다. 도랑의 깊이는 한 길 정도 되고 폭은 2미터 정도 된다. 도랑이라 부르기에는 크고 하천이라 하기에는 좁은 그런 물길이다.

몇 해 전 담양 삼지내 마을로 문학기행을 갔을 때, 마을 돌담길을 따라 흐르던 맑은 물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경사가 없는 마을 안길을 세차게 흐르는 물살이 신기하여 손을 넣었더니 손가락 사이로 물결의 힘이 느껴졌다. 혹시 어딘가에서 모터 펌프로 물을 돌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 안에서 꼬물거리는 다슬기를 보면서 그곳이 슬로시티에 걸맞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불구불한 돌담길과 돌담길 아래 흐르는 도랑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동네 안에 맑은 도랑물이 있다는 게 그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보다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정리 저수지로 가는 도랑을 끼고 있는 우리 마을은 축복받은 것이다. 삼지내 마을 안길 도랑보다도 훨씬 큰 수로였고, 크고 작은 다양한 자연석이 단단하게 도랑을 싸고 있어서 마당에서 그곳을 바라볼 때마다 슬로시티 삼지내 동내를 떠올리고는 했다. 배나무 과수원 주인 석자씨가 과수원과 인접한 석축의 잡풀을 며칠 동안 걷어냈다. 시원해진 그곳을 보니 동네가 달라 보였다. 그녀의 수고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어진 도랑으로 들어가 작년에 피었다가 시든 잡풀을 걷어내니 역시 성곽 같은 단단한 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미로 돌에 붙은 흙을 긁어내고 둑방으로 마른풀을 걷어 올렸다. 말끔하고 환하다.

마당에서 가까운 도랑의 벽을 마냥 바라본다. 장마가 오기 전에 매일 조금씩 시간을 내서 바닥의 풀도 걷어내야겠다. 떠내려가다 멈춘 나뭇가지들도 치우고, 모래가 깨끗이 씻겨지도록 수로를 청소하면, 맨발로 디딘 그곳에서 우리는 작은 물고기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집안을 비질하듯 동네 둑방도 수시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것을 안다. 마당에서는 잡초가 또 손길을 기다린다. 쉴 틈이 없지만 즐거운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