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무지개

2025-06-19     충청일보

[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6월이 가고 있다. 된더위 속에서 한차례 소나기를 퍼붓더니 하늘이 제풀에 갠다. 아주 잠깐 무지개가 둥그러니 허공중에 머물다 사라진다. 역사 속으로 아득히 멀어져간 이들이 6월이면 스치듯 잠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곤 이내 발길을 돌린다. 다시 한 차례 비가 내린다.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려고 갖은 애를 쓰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려 비 님이 내려오나 보다.

‘누구를 모시고 싶었을까’ 충북의 여성 독립운동가 신창희의 남편인 민필호 선생이다. 그는 서울 출생이다. 11세 때 휘문의숙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다. 일본의 연호가 적힌 졸업장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했다. 역사의식도 타고나는 것인가. 어린 나이에 어찌 나라 잃은 자의 수치를 알았을까. 지금의 정치 현실을 비추어 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그는 곧바로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 신규식 선생이 세워 운영하던 박달학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게 된다. 신규식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예서부터 시작된다. 당시 교사진은 박은식, 조소앙, 신채호, 홍명희 등 모두 하나같이 독립운동에 몸 바친 걸출한 인물들이다.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항일의식이야 두말해 무엇하랴.

그는 1917년에 신규식의 지도로 상해의 교통부 체신학교에 들어가 전신 기술을 배우고 중국 교통부 상해전신국 전신 검사원으로 취업한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정 법무 총장인 신규식의 비서가 되어 외교 업무를 보좌하는 한편, 동제사 업무에도 협력하여 본국은 물론이고, 만주, 구미 등지의 연락 사무를 담당한다.

그러다가 1920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 선생의 딸인 신창희(명호)와 결혼하여 명실공히 부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피부에 와닿는다. 처가로는 신창희 부녀와 사촌인 신순호네 가족이 그러하고, 본가로는 아들 민영수와 딸 민영주가 함께 독립활동을 한 것이 선 굵게 나타나 있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 겸 외무 총장인 신규식을 광동 중국 정부에 특사로 파견하여 임정을 승인하고 독립운동 지원을 협상하도록 하였는데 이때도 수행비서로 동행하게 된다. 신규식 사후에도 임시정부 재무 총장 이시영의 비서로서 재정의 실질적 책임을 맡아 일했다. 당시 임정이 집세를 내지 못하여 고소당하자, 선생의 직장 보수를 담보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한다. 상해 선생의 집은 임정 요인들의 식사는 물론, 청년 동지들의 통신 연락이나 숙소 역할까지 한다. 부인 신창희 역할은 내조를 넘어 당당한 동지로 한 몫을 단단히 해 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어려운 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1924년 민필호는 상해 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에 피선되어 교포의 자치기관인 인성학교의 운영을 맡는가 하면, 1939년부터는 중국 관직을 내려놓고 김구의 판공실장, 의정원 의원 등을 겸임하며 경제, 외교 등 여러 방면의 중책을 맡아 임정 발전에 기여한다.

광복되어 임시정부가 귀국한 후에도 현지에 남아서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고 1949년 8월 중화민국 대만 주재 대한민국 초대 총영사를 역임하다 1957년 귀국한다. 귀국해서도 한중문화협회를 재건하여 한중간에 우호와 문화교류를 활발히 하고 1963년 돈암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나라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그 뜻을 기렸다.

오늘을 있게 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선 굵은 역할을 해 왔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를 안타까운 듯 6월은 소나기를 긋고 가끔 하늘 저편에 무지개를 그린다. 아주 잊지는 말아 달라는 거다. 역사는 꿈을 향한 미래의 지표임을 기억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