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하자 6·25

2025-06-24     충청일보

[김효겸의 세상바라보기] 김효겸 전 대원대 총장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시 30분경 발발되었다. 북한군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대한민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한 전쟁이다. 이 전쟁을 놓고 일부에서 남침이니 북침이니,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이런 논쟁이 있는 것이 심히 걱정스럽다.

교전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1129일)간 이어졌다. 6.25 전쟁은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된 가장 큰 원인이다. 정전 이후 75년이 흘렀으나 북한의 핵개발 등의 영향으로 한반도 남북 간 적대적 대치 상태는 여전히 지속적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협조와 지지를 얻은 북한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0분 38도선 이남 대한민국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남침을 시도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6·25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세계 갈등이 전쟁으로 발전된 대표적 사례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유엔, 중국까지 전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이었다. 실제로 km당 투입된 병력의 수는 넓은 지역에 산재되어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보다도 밀도가 높았다.

전황은 공산 정권이 대체로 우세했고 양측이 한 번씩 승리에 다가섰다가 균등해진 상태에서 정전을 이룬 극적인 전개를 거쳤다. 북한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해 남한을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아세웠다. 적화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이후 남한과 UN군(22개 참전국) 또한 인천 상륙 작전으로 극적인 역전을 이뤄내며 한반도 전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UN군은 38도선 이북에서 대부분 후퇴했으며 이후 전쟁은 현재의 군사분계선을 두고 지속적인 소모전이 이어졌다. 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 포로 송환 등 여러 가지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여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6·25 전쟁 지속에 반대하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을 통해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대립하게 되었다. 6·25 전쟁으로 굳어진 각 체제(體制, Régime)와 상호 간 대치 상태는 정전 7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6·25 전쟁의 평화협정(종전 및 강화 조약)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으며, 남과 북의 군사·적대적 대치 상태는 여전하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남북 각자의 정부가 들어서고 38선에서 쌍방의 작은 교전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와중 북한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몰입하였다. 북한 정부 수립 이후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일으키자는 요청을 48번이나 했으나 모두 묵살당했다. 그러다 1949년 10월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애치슨 라인(미국의 극동방위선) 선언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용했다.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6·25 전쟁은 중소 양국의 사주 밑에 북괴의 기습침략으로 발발된 민족공통의 참화이며 수난이었다. 현재 남북 양측의 국민들에게는 전쟁 중이라는 인식은 드물다. 법적으로 볼 때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다. 사안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안보의식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