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좋고 돈도 좋다

2025-07-01     충청일보

[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용도에 맞는 나무가 가장 좋은 나무지요.”

'나무의 시 - 간'을 쓴 김민식 작가는 무슨 나무가 가장 좋은 나무인지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같은 대답을 한단다. 용도에 맞는 나무가 가장 좋은 나무란 말이 큰 위로가 된다. 나의 성품과 능력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게 살면 된다는 긍정이 와서다. 내가 못난 탓이라고, 부족한 탓이라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고개를 들 이유가 된다.

얼마 전 나훈아가 ‘테스 형 왜 그래, 세상이 왜 그래’라며 큰 형에게 투정 부리듯 부른 노래가 인기였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단다.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살아도 내가 잘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단다. 나도 그렇다. 사는 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가치의 혼돈을 겪고 있다. 그래서 자연에 눈을 돌린다. 그들은 돈 버는 일에 무능한 나를 탓하지 않는다. 남들과 화통하게 지내지 못하는 나를 탓하지 않는다. 늘 반긴다. 평안을 주고 기쁨을 준다. 내게 처음 안긴 나무를 기억해 보았다.

늦은 봄, 아이들과 도랑 가에서 놀다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호드기를 만들었다. 제법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남은 가지는 냇가 둑에 꽂았다. 다음 해 보니 두어 가지가 새로 벋고 잎이 새로 나 반짝였다. 어린 날 여름, 마루 구석에 무심코 두었던 불그레한 토마토가 며칠 후 빨갛게 익었을 때 느꼈던 경이처럼 뿌리도 없던 나무가 새잎을 틔운 일을 잊을 수 없다.

미루나무에 대한 기억은 외로움과 아픔이다. 바람 한 점 없고 아이들 소리도 없던 여름날,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들던 내 눈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먼 산도 다랑논도 다 흐릿하고, 오직 세상에 그와 나만 있는 듯 시간이 멈췄다. 그 후 미루나무는 바람 한 줄기 불어도 나뭇잎 전체가 흔들리듯 온 마음을 흔들었다. 20여 년이 지난 후 고향에 가니 내 나무가 없었다. 잘린 나무는 성냥공장으로 갔다고 했다. 집도 사라지고 나무도 사라진 고향, 그러나 우리 집을 생각하면 미루나무가 먼저 잎을 반짝이며 다가온다.

아이들도 제 길로 떠나고 나도 퇴직한 후엔 나무가 더 자주 마음에 들어왔다. 벚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가 들어오더니 이팝나무, 때죽나무, 칠엽수도 들어왔다. 이제는 각각의 잎은 물론이고 둥치의 껍질까지 알고 싶다. 더불어 나이테를 보며 그가 계절을 보낸 수고를 알고 싶다. 속살의 감촉과 색까지 알고 싶다.

대추나무로 만든 담뱃대에 그림을 새겨 넣은 화가 이중섭같이, 나도 내가 사랑하는 나무 속살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지 생각하다가 내 책상을 더듬었다. 하얀 자작나무 합판이다. 너무 차갑지도 않고 매끄럽지도 않다. 적당하게 저항하며 안기는 촉감이 정겹다.

나무에 관한 책을 좋아한다. 나무와 정원이 주제가 되는 영화도 좋아한다. 그러나 이제는 돈도 좋아한다.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밤나무를 심었듯이, 인재를 키우고 나무를 키우는 것이 나라에 이로운 일이라 말한 SK의 창업자, 고 최종현 회장이 충주 인등산 1.500만 평에 나무를 심었듯이 나무를 심고 싶다. 묵을 먹을 수 있게 열매를 주는 참나무, 고향 마을 이름을 ‘가래울’이라고 짓게 만든 가래나무, 하얀 수피를 벗겨 애인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낭만의 자작나무를 심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 품이 넓어 그늘을 많이 주는 느티나무를 많이 심고 싶다.

그리고 타냐, 여사처럼 숲 자락에 정원을 만들고 싶다. 쉼이 필요한 이들이 와서 ‘와!’하고 하늘로 두 팔 벌리다가 넓은 평상에 사지를 다 내려놓고 잠들면, 살그머니 뒷걸음으로 가서 담요를 덮어주고 싶다. 여름 대청에서 낮잠이 들면 엄마가 부쳐주던 부채 바람 같은 바람이 곤한 몸 위에 꿈처럼 내리리라. 그리고 바람 속에서 ‘각각의 나무가 제 본분을 다하듯 내게 맞는 역할을 하다 가자.’는 소리를 들으리라

꿈속에 꿈이 또 오듯 열린 창으로 설탕을 조리는 듯 달콤한 냄새가 들어왔다. 노랗게 물 말라가는 계수나무잎이 주는 선물이다.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다가 또 생각한다. 주름진 얼굴의 나도 향기를 내고 싶다. 마른 잎이 내는 가벼운 향을 내며 가고 싶다. 멀리 석양을 배경으로 느티나무잎이 떨어지고 있다. 나무도 좋고 이젠 돈도 좋다. '나무의 시 - 간'이란 제목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