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교육은 미래의 등불이다
2011-09-27 윤한솔
아끼바는 본래 양치는 목동이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무식군 이었으며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아끼바가 주인집 딸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것을 안 주인은 노발대발하여 딸과 아끼바를 내쫓는다. 집에서 쫓겨난 두 젊은이는 결혼을 한다. 그리고 아끼바리의 부인은 남편의 무식함을 한탄한 나머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학교에 가도록 권한다. 그러나 아끼바는 ‘내 나이 이미 40을 넘었는데 이제 무슨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갗 라고 하며 거절한다. 양치는 일 밖에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아끼바는 매일 양떼를 몰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먹이를 먹이는 것으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끼바는 목이 말라 조그만 개울가에 가서 엎드려 물을 마시려는 순간 그 개울 속에 있는 조그만 바위에 흐르는 물이 부딪쳐서 흰 거품을 일게 하는 것을 발견한다. 유심히 보니 바위의 한쪽이 움푹 패어 있지 않은가. 오랜 세월 물이 스치는 바람에 딱딱한 바위의 형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끼바는 여기에서 하나의 진리를 깨닫는다. 지식의 물결 속에 내 자신을 던져버리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 머리도 변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 아끼바는 아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는 40이 지나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마침내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히레루는 아끼바리보다 전 시대의 사람이지만 그도 역시 가난한 사람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팔아서 근근히 생활을 하며 야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내야 할 수업료가 없어서 학교에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공부하고자 하는 그의 의욕은 대단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하루는 학교 지붕에 올라가서 조그만 틈에 귀를 대고 방에서 들려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피곤이 몰아닥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밤사이에 눈이 내려 지붕에서 잠자고 있는 히레루의 몸을 솜처럼 덮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눈에 덮여 지붕에서 잠자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를 지붕에서 업어 내렸다. 물론 그의 몸은 얼음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그 후 히레루는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학자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유태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이후부터 유태의 학교는 수업료를 받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무상의무교육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태의 부모가 그들 자녀에게 반드시 해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어린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배움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교 선생님이나 랍비가 아니라 부모가 이 이야기를 해준다는 사실이다. 자녀에게 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부모들은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의욕을 가지게 된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시 새로운 각오와 의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자들은 自成的動機 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있다. 유명한 바보 온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중국의 진나라 고사(故事)에 반딧불로 글을 읽고 손강(孫康)의 눈빛으로 글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의 교육열도 대단하다. 아마 그 열의만으로 본다면 유태인에게 뒤질 바가 없다. 그러나 교육열의 방향이 다른 것 같다. 유태의 부모는 가정에서 부모가 직접 교육하는 일에 더욱 열의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부모는 가정에서의 교육보다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모든 것을 학교 선생에게 맡기는 데에 열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양쪽의 열의가 모두 있어야 한다. 가정에서 교육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열의가 있어야 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일에도 열의가 있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열의가 결핍될 때 그 교육열의 열도는 부족하고 그 열의의 방향이 잘못되기 쉽다. 우리의 경우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왕성한 교육열은 지나치게 밖으로 향해있는 것 같다. 그 열의를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시급하다. 조상대대의 문전옥답을 팔아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교육열을 안으로 돌려 가정에서 그와 같은 정열을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 점이 우리가 유태민족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의 하나일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