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 오랜 뿌리 내림 후에 순을 틔우다

2025-07-02     충청일보

[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아버지는 생전에 식물 돌보는 것을 좋아하셨다. 필자가 자랄 때 마당이 있는 주택에 살 때, 아빠는 늘 정원의 잔디와 식물들을 정성껏 가꾸셨고, 이후 아파트로 이사하시고 나서는 화분에다 여러 식물들을 심고 가꾸셨다. 나는 아빠가 식물 가꾸시는 것을 보고만 자랐지 내가 식물들을 직접 돌본 적이 거의 없다 보니 식물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다.

성인이 된 후 혼자서도 간혹 작은 풀꽃을 사본 적은 있지만 오래 잘 키워보지는 못했다. 결혼하고는 식물 돌보는 것은 남편이 맡아주었다. 그런데 한 8년 전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주말에야 집에 오게 되었는데 어느 순간 식물들이 죽어 남편이 화분들을 비워 대피공간에 넣어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식물을 돌본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싱싱하던 식물들이 다 마르도록 돌봐주지 않은 것이 너무 미안하고 화분이 비워지도록 몰랐던 것에 더 놀랐다.

그런데 딱 하나, 죽지 않고 버틴 화분이 하나 있었다. 아빠가 생전에 아끼며 정성껏 키우시다 한 십년 전에 주신 난초였다. 이 난초도 말이 살아 있는 거지 거의 말라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이 난초 하나는 살려보자 싶어 관심을 갖고 자주 들여다보며 물을 주기 시작했다. 아빠의 오랜 손길이 깃든 화분이라 마치 내 곁에 머무는 아빠의 마음인 듯 싶었다. 누렇게 쳐진 잎을 잘라주자 잎이 달랑 3장 남았다. 인터넷에서 난초 키우는 법을 검색해보니 난초는 한 2년마다 분갈이를 해주어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서 그동안 한 번도 분갈이를 해주지 않아 분갈이를 하러 화원에 갔다. 아주머니가 화분에서 흙을 비우자, 뿌리가 다 썩고 딱 한줄 남았다.

그때부터 난초에게 애정 어린 인사로 살아나기를 기원해주며 물을 주었다. 오래도록 난초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래도 남은 세 잎은 축 쳐지지 않고 버텨주어 것만으로 감사했다. 한 열 달이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물을 주다 깜짝 놀랐다. 오래된 난초 잎 곁에 아주 작은 새 촉이 돋아난 것이 아닌가! 오랜 동안 난초는 묵묵히 보이지 않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나 보다. 난초는 쑥쑥 자라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은근히 조금씩 매일 자랐다.

난초는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은은한 향을 가꾸어가는 모습이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보이지 않게 자신의 덕을 길러가는 군자를 닮아 사군자로 여겨져 왔다. 이번에 나는 한줄 뿌리 난초가 오랜 시간 보이지 않게 뿌리를 내린 뒤에야 새순을 내미는 것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내면을 깊이 하는 군자의 덕을 음미하게 된다.